어느 날 나는 브래지어에 관한 것을 쓰려 했지만, 결국 청소에 관한 것을 쓰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났다. 시계를 보니 정오가 되기까지 정확히 8분 남았다. 그래도 아침은 아침이니 난 아침에 일어난 것이 맞다. 이상하게 어제보다 내 방이 더 지저분해진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아직 완전히 떠지지 않은 눈으로 내 방을 죽 둘러보았다. 딱히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이유야 어찌 됐든, 12년 동안 누레진 벽지가 새삼스레 눈에 띄었다.
방은 좁았다. 책상 하나 행거 하나, 그리고 내 몸뚱이 하나 겨우 누울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구석구석 비어있는 공간에는 책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언젠가 정리를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 그냥 방치해둔 책들이었다. 저 널브러진 책들 중에는 칸트도 있고, 프로이드도 있고, 니체도 있고, 비트겐슈타인도 있었나? 아무튼 푸코와 데리다도 있었다. 어쩌면 성경책도 있을지 몰랐다. 비록 난 하나님을 믿지 않지만 말이다.
책 이외에는 내 방에 있을 만한 것이 없었다. 분명 있을 만한 것이 있을 리가 없었는데, 널브러진 책 더미 위로 브래지어가 하나가 올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잠이 덜 깨 헛것을 본 걸까? 나는 내 눈을 세게 비벼 다시 보았지만, 브래지어는 오히려 더 선명하게 보일 뿐이었다. 아니, 저딴 물건이 왜 내 방에 있는 거지? 설마, 내 건가? 나는 두 손으로 내 가슴을 더듬거려 보았다. 아참, 나는 남자지!
브래지어를 조심스레 손끝으로 집어 들었다. 새 거는 아니었다. 분명 누군가 입고 벗어둔 것이었다. 어젯밤 내 방에 여자가 자고 갔었나? 누구지? 은희, 지은, 경아, 윤서, 미래……, 기억을 더듬거려 보았으나 딱히 생각나는 여자는 없었다. 어젯밤엔 내가 술을 마시긴 마셨는데, 그렇다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마신 건 아니었는데, 혹시나 해서 고개를 숙여 밑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나는 팬티를 벗고 있지 않았다.
아무튼 누구의 것인지도 모를, 딱 보니 가슴이 그리 크지 않은 여성의 것으로 추정되는, 이 브래지어 하나 때문에 내 방이 지저분하게 느껴졌던 것일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그건 비약일 뿐이었고, 차라리 널브러진 책이라도 치우면 지저분한 느낌이 덜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해보았지만, 막상 널브러진 책을 치우려니 사서 고생하는 꼴인 것 같아 결국 나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언제고 청소는 하긴 해야 했다.
시간은 벌써 정오를 지나가 있었고, 아침에 일어났지만 아침의 느낌도 제대로 느끼지 못한 채, 나는 저녁을 기다리게 되었다. 저녁은 금방 올 것이고, 저녁이 오면 금세 또 밤이 될 것이고, 밤이 되면 어느새 하루가 지나갈 것인데, 그러다 보면 아침은 또다시 찾아와 나를 흔들어 깨울 것이었다. 그럼 난 어제와 하나도 다르지 않은 오늘을 살게 되겠지. 아니면 오늘과 똑같은 내일을 살든가.
배가 고팠다. 방엔 먹을 것이 없었다. 돈도 없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굶는 수밖에! 나는 눈치 없이 새어나오는 침만 삼키고 있는데, 어제 먹다 남겨 두었던 빵이 생각나 방 안을 이리저리 찾아보았지만, 빵은 보이지 않고 빵부스러기만 군데군데 떨어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빵부스러기 말고도 떡고물 같은 것도 같이 방바닥에 떨어있는 것이 보였는데, 분명 나는 빵보다 떡을 더 좋아하긴 했지만 근래에 떡을 먹은 기억이 없었다. 하긴, 하도 청소를 하지 않았으니 어쩌면 몇 년 전에 먹다 흘린 떡고물일수도 있었다.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럴 땐 가만히 누워 있는 것이 제일 좋았다. 내가 자리에 눕자마자 갑자기 천장이 무너지지 않았는데, 대신 천장이 무너지는 상상을 했다. 뻥 뚫린 천장에는 푸르지 않은, 먹구름 가득한 하늘이 보였고, 가느다란 부슬비가 누워있는 내 얼굴 위로 흩뿌려지는 상상을 해보았는데, 마치 관 속에 누워 누군가 뿌리는 모래를 맞는 기분이랄까, 상상만으로도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아무튼 허기는 사라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브래지어를 집어 들었다. 가만 보니 이 브래지어는 은하의 것인 것 같기도 했다. 12년 전, 첫 섹스의 기념으로 내게 주고 간, 필요 없다고 말했는데도 굳이 내 방에 놓고 간 그 브래지어인 것 같았는데, 또 가만 보니 아닌 것 같은 생각도 들고, 아리송하고 모호한 심정으로 브래지어만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가 나는 변태아저씨처럼 브래지어에 코를 들이대고 냄새를 맡기 시작했는데, 브래지어에선 곰팡내 비슷한 냄새가 났고, 그래서 난 인상을 쓰며 들고 있던 브래지어를 방구석에 휙 던져버리지 않았다. 일단 간직하고 싶은 기억마냥 손에 꼭 쥐고 있었다.
방은 여전히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뭐 때문인지 방을 다시 한 번 샅샅이 살펴보고 있는데, 바퀴벌레가 벽을 따라 느릿하게 기어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바퀴벌레를 잡기 위해 조심스럽게 벽 쪽으로 다가갔다. 하지만 눈치 챈 바퀴벌레는 재빠르게 기어가더니 널브러진 책 더미 속으로 달아나 버렸다. 난 책 더미를 이리저리 파헤쳤지만 어디로 도망갔는지 바퀴벌레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책 더미 속에서 12년 전에 썼던 일기장을 우연히 발견하였다. 나는 일기장을 펼쳐 읽기 시작했다. 일기장을 다시 들춰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내가 내 과거의 기록을 보는 건 상당히 민망한 일이었다. 일기장에는 온통 은하 얘기만 쓰여 있었고, 일기에는 은하가 내 방에 브래지어를 놓고 간 것도 적혀 있었는데, 내가 알고 있던 것과 달리 첫 섹스 때가 아니라 마지막 섹스 때 놓고 간 것이었다.
책 더미 속으로 들어갔던 바퀴벌레가 어느새 다시 나타나 벽을 기어 다니고 있었다. 이번엔 꼭 죽여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던 일기장으로 바퀴벌레를 사정없이 후려쳤다. 다행히 바퀴벌레는 퇴치했지만, 일기장은 더러워졌다. 난 일기장에 묻은 바퀴벌레의 흔적을 휴지로 닦아내지도 않은 채, 구석에 있는 책 더미 위로 휙 던져버렸다.
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방이 지저분하다는 느낌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 느낌이 계속 드는 것이 싫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오늘 방청소를 하기로 결심했다. 별다른 것이 없음에도 방이 지저분하게 느껴지는 것은 어쩜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 왔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버릴 건 버리고, 남겨야 할 것도 웬만하면 버리고, 그렇게 버려서 다시 새로운 것을 채워나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하지만 내 방을 보고 있자니 막막하긴 했다. 방은 좁았지만 제대로 청소하기 시작하면 시간이 꽤 오래 걸릴 텐데, 막상 하려니 하기가 귀찮았다. 더구나 배도 고프니 더 귀찮았다. 방청소를 하긴 해야 하는데. 귀찮아서, 너무나 귀찮아서 나는, 아예 통째로 내 방을 먹어버리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