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12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다
세희 이야기
어머니는 다 알고 계셨다.
“ 빨리, 빨리 그려. 뭐가 이렇게 오래 걸려?
” 대리님, 사다리는 디테일이에요. 그렇게 막 그리면 어떻게 해요?
“ 대각선도 넣고, 크로스도 그려요. ”
“ 아~~ 말 진짜 많네. 네가 그려. ”
“ 만원 2명, 5천 원 4명, 3천 원 5명, 로또 3명, 오케이? ”
“ 오케이~~~ ”
“ 자 우리 만수르 부장님부터 레고 레고~~~ ”
“ 만원! 만원! 만원! ” 곳곳에서 만원을 원하는 함성이 들린다.
다른 부서 직원들이 “만원” 함성 소리에 구경 차 놀러 왔다.
“ 또 사다리네. 오늘은 누가 로또를 맞으려나? ” 누가 만원에 걸리는지 궁금해서 우리 옆에 서 있는다.
“ 아~~~~ 아깝다. ”
“ 앗싸 , 부장님 5천 원 ”
“ 다행이네, 만원 안 나왔다, ”
수능시험 때보다 더 긴장되고 땀이 난다. ‘ 나만 그런가? 이게 뭐라고? ’
내 차례다. 왠 일? 내가 만원이다. 말도 안 돼.
“ 모두들 내 간식 많이 먹었잖아요!!!
나 한 번만 더 탈 께요. 기회를 주세요. ” 간절한 호소의 눈빛을 보냈다.
“ 안 되지, 그런 게 어딨어? 다음 타자 추~울 발~~~ ”
“ 김 대리가 로또네. ”
“ 이거 누가 그렸어? 아무래도 김 대리가 미리 계산하고 그린 것 같은데? 이거 김 대리가 그린 것 맞지? ”
“ 아니에요, 과장님, 이거 현수가 그렸어요. ”
“ 미리 계산하거나 사심 없이 본능대로 그렸습니다.
저 문과입니다. 이과 아니에요. 의심 안 하셔도 됩니다. ”
“ 맞아요. 현수 진짜 빨리 그렸어요. 계산할 시간도 없었어.
그리고 시간 줬어도 쟤는 계산 못해요. “
옆에서 미진이가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게 현수를 두둔했다.
현수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오히려 고마워하는 것 같았다.
‘ 우리 현수 세상 참 편하게 살았네. ’
모든 것이 끝났다. 정산이 시작됐다. 승자와 패자가 환호와 탄성을 쏟아낸다.
“ 현수야, 네가 갔다 와라, 떡볶이랑 튀김, 순대, 그리고 골고루 간도 넣어서, 냉커피도 사 오고 ”
부장님은 현수에게 5만 원 한 장을 더 주셨다.
“ 남은 건 니 용돈 해라. ” 현수는 신이 나서 간식을 사러 나갔다.
“ 아! 내가 갈 걸 ~~~.” 미진이가 허를 찔렸다.
부장님은 맹한 현수를 귀여워하셨다.
직원들 모두 제자리고 들어가 마무리 업무를 하고 있다.
정찬을 먹은 뒤 커피로 마무리하면 딱 퇴근시간이다.
오랜만에 기분이 좋았다. 한참 동안 우울하고 밥도 먹지 못했는데 회사에 나오면 생각을 하지 않아서 좋다.
현수는 나에게 따듯한 카모 카일을 가져다주었다.
분명 미진이가 현수에게 나에게는 카모마일을 가져다주라고 했을 거다.
나랑 카모마일을 자주 마시곤 했으니까
“ 나도 다음부터는 그냥 커피로 줘. 이제 커피 마셔도 괜찮아. ”
“ 어? 이제 커피 마셔도 돼요? 당분간 안 마시는 게 좋지 않아요? ”
“ 그래, 세희야, 너 카페인에 약하니까 당분간은 허브티나 주스 마셔.
요새 피부도 너무 거칠고, 너 요새 자꾸 붓는 거 같으니까
그럴 때는 카페인이 안 좋아. 비타민을 섭취해야 한다. “
“ 아니에요. 이제 진짜 커피 마셔도 괜찮아요.
그동안 못 마셔서 너무 답답했는데 이제 마셔도 괜찮아요. ”
모두들 놀라서 나를 쳐다본다. 알고 있었다. 막내 현수까지 알고 있으면 다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 부장님이랑 과장님도 알고 계셨나? 물어볼 수도 없고. 어차피 조금 있으면 자연히 알게 되겠지. ’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 고개를 뒤로 젖혔다. ‘ 이제 그만, 이제 그만 울자. ‘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에 민 과장님이 어느새 따라오셨다.
“ 세희야, 너 괜찮아? 며칠 휴가 내서 걱정했는데.
얼굴은 좋아진 것 같다. 진짜 괜찮은 거야? ”
“ 네, 과장님 저 당분간 일만 할 거예요. 모두들 배려해주시고, 모르는 척하느라 힘들었을 텐데.
이제 밀린 일들 해야죠. 그래도 다행이에요. 이렇게 일을 할 수 있어서
저 지난주 토요일에 수술했어요. 의사가 하자고 하더라고요.
고민하다 수술했어요. 그런데 오히려 수술하고 나니 후련해요.
후련해서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그런데 이제 그만 생각할 거예요.
다시 힘 낼 거예요. 아기는 다시 꼭 나한테 돌아와 줄 거예요. “
“ 세희야, 내가 유산을 몇 번 했는지 아니? ”
“ 네?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나는 깜짝 놀랐다.
“ 나 세 번이나 했다.
첫 번째는 대학생 때, 그때 나랑 남자 친구 둘 다 피임을 잘 몰랐어.
우리 때는 성교육이 없었어. 부모님도 쉬쉬하시고 그저 공부만 하라고 했지.
성 뭐 이런 건 발랑 까진 애들이나 말하는 거라 했어.
내 주변에는 다들 좋은 대학 가느라 공부만 했거든.
방법이 있나? 남자 친구랑 나랑 같이 독학했어.
그때는 둘 다 처음이라 첫 시험 불합격.
간신히 두 번째 시험 합격, 내가 그때 생각하면 웃음이 나온다.
밤새 얼마나 씨름을 했는지, 말이 아니라 진짜 몸 씨름했다. 날이 새도록
둘 다 승부근성은 있어서 포기를 몰랐고 끊임없이 도전했다.
그렇게 날 새고 공부를 했으면 서울대 가서 장학금 받았다. “
민 과장님은 언제나 재밌다. 그래서 민 과장님이 좋다.
“ 지금은 그나마 콘돔이나 피임약을 사기 쉬운데. 약국 가서 피임약 달라고 하지를 못 하겠더라고.
그래서 남자 친구가 항상 콘돔을 준비했는데 급하게 여행 가느라 콘돔을 준비 못했지.
약국 문은 닫혀 있고, 편의점도 근처에 없었고
그날 밤에 애가 생겼나 봐. 학교를 그만둘 수도 없고, 애를 낳을 수도 없고,
남자 친구한테 말도 못 하고 혼자 병원 가서 수술했어.
다음 달에 군대 가는 애한테 그런 말을 어떻게 해?
걔는 나 임신한 것도 모르고 훈련소 갔어.
그리고 제대하기도 전에 헤어졌지.
두 번째는 입사해서 승진시험 준비하고 매일 야근에 주말까지 집에 일을 가져와서 일을 했는데
어느 날 자고 있는 데 팬티가 축축 한 거야.
침대 시트까지 피가 흥건했지. 생리가 터진 줄 알았는데 아니었어.
워낙 생리도 불규칙하고 둔해서 난 내가 임신 한 줄도 몰랐어.
남편이랑 나랑 얼마나 놀랐는지. 그때는 그렇게 슬퍼하지도 않았어.
승진이 너무 하고 싶었거든, 일하느라 정신도 없었고
아마 알았어도 어쩌면 내 발로 가서 수술했을지도 몰라.
이번에 승진하지 못하면 끝이니까 동기들 다 승진하고 나만 남았는데
그럼 회사 그만두라는 소리지, 다닐 수 있겠니? 자존심 상해서
아니지, 다니지 못할 이유도 아니지? 그게 왜 자존심 상할 일이야.
더 악착같이 일해서 내가 얼마나 유능했는지 보여줘야지.
내가 입사할 때 제일 점수가 좋았는데. 나만 승진 못 했잖아.
총무과 꼴통 이 과장 봐라. 이 과장이 제일 점수가 낮았는데. 나보다 먼저 승진한 게 말이 되니?
왜 여자라는 이유로 맨날 승진이 누락되는 거야?
차라리 학교 다닐 때가 더 공평한 것 같아.
그때는 시험 보면 O X로 채점해서 점수가 객관적으로 나왔잖아.
등수도 점수로 매겨지고
일등으로 들어왔는데 꼴등으로 진급했어.
꼴등인 이유는 여자니까. 니들은 시집가서 애 낳고 키우고 남편 돈으로 살면 되니까.
말이 되니? 자기들도 다 여자 속에서 나와 놓고?
여자들은 다 엄마만 돼야 하는 거야?
자기 딸들은 그렇게 공부시키면서
왜 남의 딸들은 엄마만 돼야 해?
그래 놓고 왜 맨날 여자가, 임신이, 출산이, 이딴 소리를 하는지....
아직도 화나. 후배들은 내가 겪은 일 안 겪었으면 좋겠어.
마지막은 작년이다.
우리 집에 공주님만 두 명인데, 들어선 애가 또 딸이었어,
혹시나 해서 남편이 성별검사하자고 했었거든. 아주 망연자실하더라.
울며불며 사정사정하더라. 미안하지만 수술하자고
자기는 못 키운다고. 아직도 아파트 대출금이 집값의 절반인데 어떻게 키우냐고?
교육비, 집 담보 대출이자 원금, 각종 공과금에 보험, 생활비, 거기에 아기 도우미 비용까지
무슨 돈으로 사냐고? 그래서 수술했다.
둘이서 뼈 빠지게 버는 데 왜 남는 게 없니?
그래도 아마 아들이었으면 낳았을 거야.
워낙에 시댁에서 기다렸잖아. 맏이이기도 하고,
아마 아들이었으면 포상금 주셨을 거야. 아들 포상금, 딸 포상금은 없다.
동서들은 아들 낳을 때마다 받았는데 나만 못 받았다.
남편은 그 포상금이면 키울 수 있을 거라 계산한 거지. 하긴 포상금이 없으면 못 키운다.
남편이 이해는 가. 얼마나 딸을 이뻐하는데, 속으로 많이 울었을 거야. 착한 남자니까
마지막 수술하고 내가 어떻게 했게? 산부인과 가서 몰래 수술했다.
우리 남편이랑 시댁이랑 다 몰라. 이제 아들은 없는 거지.
난 이제 출산 끝이야. 내가 애 낳는 기계도 아니고
시원섭섭해. 아들을 못 낳은 건 좀 섭섭한데. 어쩌겠니?
그래도 회사는 다녀야 하고 딸들이랑 우리도 다 살아야 하잖아?
아들이 무슨 대수니?
근데 그런데 말이지. 첫 번째랑 두 번째 수술할 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죄책감도 없었는데
마지막에 수술한 그 아이는 잊혀지지가 않는다.
여자 아이라는 이유로 죽은 거잖아.
작년 일이지만 아직도 생각이 많이 나.
우리가 부자였다면 용기가 있었더라면 그 아이를 낳았을까?
거실에서 “ 언니 언니 ” 하면서 셋이 노는 모습이 자꾸 눈에 그려진다.
분명히 아이는 둘인데 누가 ‘ 아이가 몇이에요? ‘ 물어보면 난 셋이라고 대답해.
나한테 아이는 둘인데 셋인 거야.
아이고, 내가 너한테 왜 이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
너 더 어수선하겠다. 미안. 그냥 나도 그랬다는 거야.
미혼도 그렇지만 기혼 여성도 여러 이유로 중절 수술 많이 한다.
많이 했으니까 죄책감 갖지 말란 소리가 아니고
네가 그런 결정을 했다면 분명 이유가 있었을 거야. 너무 아파하지 말란 소리야.
너랑 같이 오래 일하고 싶어. 세희야.
너는 야무지고 똘똘하니까 잘 버틸 수 있을 거야.
강한 놈이 사는 게 아니고, 살아남은 놈이 강한 거야.
우리 같이 살아남자. 기운 차려.
버스 왔다. 나 먼저 간다. “
나는 분명 운이 좋다.
“ 은서야, 이번 주말은 밥 먹으러 가자.
나야 가게에서 수시로 보지만, 엄마, 아빠가 너 못 본 지 오래잖아.
아빠 족발 좋아하시니까 족발 사 갈까? 아니면 회?
너 뭐 먹고 싶어? 이제 다 먹을 수 있잖아. 뭐든 말해. 다 먹자.
전화해서 엄마한테 뭐 드시고 싶은지 직접 물어봐.
네가 물어보면 더 좋아하실 거야. “
“ 어, 전화를 하라고? 갑자기? 지금?
내일 오빠 가게에서 어머님 볼 거잖아. 오빠가 직접 가게에서 물어보면 되지.
내가 굳이 전화를 해야 해? 나 원래 전화 잘 안 하잖아.
친정에도 일이 있어야 전화하는데. 나 안부나 인사 차 전화 못해.
해보질 않고 살았는데 갑자기 어떻게 해. 어색해.
집도 가깝고, 자주 보는 데 할 필요성도 모르겠는데.....
어머니, 아버지 두 분 다 내가 하셨으면 하는 거야? “
“ 응, 좀 그러신 것 같아. 다른 며느리들은 일주일에 한 번
어떤 며느리는 이틀에 한 번씩도 전화를 한 다는데
넌 전화는 잘 안 하잖아. 그게 좀 그러신가 봐. “
“ 글쎄? 나 좀 불편해. 전화는 할 내용이 있어야 하는 건데.
얼굴 보고 얘기하는 게 더 편하고, 그리고 얘기할 거리도 있어야 하는데,
끊을 때는 어떻게 끊어야 해? 진짜 이상할 것 같아. “
“ 대부분 그냥 안부 전화야. 식사하셨어요? 어디 불편하신데 없으세요? 잘 지내세요?
그런 이야기들 하는 그냥 형식적인 거야. “
“ 그래, 맞아. 그런 형식적인 걸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남들 한다고 우리도 해야 할 이유는 없잖아.
일주일에 한두 번은 시댁도 가고, 우리 집으로 오시기도 하고 자주 보잖아.
나도 가끔 오빠 일할 때 혼자 놀러 가기도 했어.
길에서 아파트 단지 내에서 우연히 마주치기도 하고
그럴 때 더 반갑고 그렇던데. 오히려 더 편하고 자연스러워.
의무감에 하는 전화는 오히려 더 남 같아.
친한 관계에서 의무는 없잖아.
보고 싶을 때 가서 보고, 전화하고 싶을 때 전화하고, 마음에서 시키는 데로 하고 싶어.
이상해. 왜 그런 전화를 받고 싶으신 걸까?
며느리 전화는 받고 싶으신가?
오빠는 우리 엄마한테 전화하는 게 쉬워?
가끔 한 번씩 보긴 하지만, 일주일에 한 번씩 전화해야 하면 어떨 것 같아?
아마 힘들 걸. 얘기할 거리도 없고. “
“ 그렇지, 내가 장모님하고 할 얘기도 없고, 그리고 어느 사위가 장모님한테 그렇게 자주 전화하냐?
주변에 그러는 사위들은 없어. “ 지후가 당황한다.
" 자연스러운 게 좋은 거야.
나도 그렇고, 그래서 사위가 전화 안 해도 섭섭해하지 않으시는 거야.
엄마가 전화 안 한다고 뭐라고 한 적 없고.
우리 새 언니도 엄마한테 형식적인 전화는 안 해.
오빠가 뭔 사고를 쳤거나 필요할 때 전화 하지.
무소식이 희소식이다. 하고 싶으면 하고, 오고 싶으면 오겠지. “
엄마는 그래, 우리도 그렇고, 그게 우리 집 스타일이야.
“ 그렇지, 그건 그렇지. 알았어, 내가 그냥 내일 물어볼게. ”
광어회와 한치, 멍게를 사서 집으로 들어갔다.
은서는 멍게를 좋아한다. 비리고 냄새나서 못 먹겠다고 그 좋아하던 멍게를 두 달이나 먹지 못했다.
밥상은 다 차려져 있었고, 매운탕 거리만 끓이면 된다.
“ 우리 새 애기 정말 오랜만에 보네. 거의 한 달 만인 것 같은 데.
어디가 아팠어? 아님 회사일로 바빴던 거야? “
“ 네, 아버님 몸이 좀 안 좋았어요, 일이 바쁘기도 했고요.
근데 몸도 좋아졌고, 밀린 일도 거의 다 처리해서 이제 한가해요.
앞으로 자주 놀러 올 거예요. “
“ 몸이 좋아졌다고? 일도 다 처리했다고? 너 뭐 다른 일 있었던 거 아니야? ”
어머님이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신다.
“ 네, 괜찮아요. 이제 지후 씨가 저 안 데려다줘도 될 정도로 괜찮아요.
수요일부터 버스 타고 다니고 있어요. 며칠 야근하면서 일도 다 정리했어요. “
“ 너 살도 빠지고 얼굴도 많이 안 좋은데 혹시 애라도 들어선 거 아니니? 임신 말이야. “
“ 네, 아니에요. 임신 아니에요.
저희 임신 계획해서 낳을 거예요. 내년에 집도 사고, 올해까지는 회사 일로 바빠서
애를 가질 수가 없어요. 내년 이후에 가질 거예요. “
“ 은서야. 너는 딸이고, 네 집에서는 조카들이 많지만 지후는 강 씨 집안 장손이야. 그리고 첫 손주야.
다들 기다리고 있어, 아버지도 그렇고 나도 그래.
다른 친척 분들도 그렇고 그러니까 그냥 임신했으면 좋겠는데.
집 장만이니 회사니 이런 거 생각하지 말고.
집은 장만할 때 우리가 좀 보태주면 되고, 회사는 너네 회사가 무슨 대기업도 아니고 중소기업
조그만 회사잖아. 꼭 네가 거길 다닐 필요가 있을까?
너랑 지후 나이도 있고, 늦게 가지면 너네가 힘들어.
애도 젊었을 때 키워야 한다. “
나는 지후를 흘깃 쳐다봤다. 지후도 당황하는 눈치다.
뭐라 말해야 좋을지 모르는 눈치다.
기다리고 있다. 시아버지도 “ 네 ”라는 나의 대답을
“ 제가 다니는 회사. 작은 회사 아니에요. 엄연히 내실 있는 중소기업이고
저도 인정받고 다니고 있어요.
승진도 하고 싶고 일도 재미있어요.
임신하고 출산해도 회사는 계속 다닐 생각이에요.
살림하고 아이 낳고 잘 기르는 것도 좋은 데
최대한 다니다. 도저히 안 되겠으면 그때 다시 생각해 볼게요.
내년까지는 회사 다니고, 내 후년쯤 아이 가질게요.
집 장만은 지금 전세금에 그동안 적금 부었던 거 타면 지금 사는 아파트 정도는 살 수 있어요. “
“ 너 애 낳고 어떻게 회사를 다니려고 그래? 말이 쉽지?
여기서 회사까지 두, 시간 거리야.
매번 지후가 출, 퇴근을 어떻게 시켜주니? 그러다가 교통사고라도 나면 그땐 어쩌려고? “
“ 저희 내년에 전세 계약 끝나면 일산으로 이사 가려고 하는데요.
회사도 근처고, 친정도 가까워서 엄마가 키워주면서 회사 다닐 수 있어요.
언니들도 있고 조카들도 다 커서 형제들 역할해 줄 테니 친정 쪽이 편할 것 같아요.
지후 씨랑도 일산 쪽으로 집 얻고, 아이 낳아도 회사 다니기로 했어요.
지후 씨 뭐라고 얘기해봐. 우리 약속했잖아? “
지후는 난처한지 나와 시어머니를 번갈아 쳐다봤다.
“ 집 사는 큰 문제를 그렇게 너희 둘이서만 결정하니?
그리고 왜 니 친정 쪽으로 집을 얻어?
그럼 우리는 뭐 허수아비니? 지후 너도 동의한 거야? 친정 쪽에 집 얻는 걸로? “
어머님은 지후 씨를 원망하듯이 바라보았다.
“ 아니야. 아직 결정한 거 아니야. 생각만 해본 거고 의논해보려고 했어. ”
‘ 아이고 이 남자야. ’ 한숨이 나온다.
“ 어머님, 만약 어머니가 아이를 돌봐 주실 수 있으면 여기서 집을 마련해도 괜찮아요.
저는 친정이든 시댁이든 아이 돌봐주시는 곳에서 집을 사려고 해요.
어머님이 봐주시면 여기서 집 사도 되고요. 그런데 많이 힘드실 거예요.
저희 엄마도 조카들 네 명 다 키워주셨는데. 저랑 언니들이 도와도 힘들었어요.
언니 혼자선 아마 못 키웠을 거예요. 그래서 일부러 일산 쪽으로 결정한 건데.
어머님 키워 주실 수 있으세요? “
시아버지도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당황하셨을 것이다.
갑자기 시아버지가 불쑥 말씀하신다.
“ 그래, 우리가 어떻게 뭐라 하겠니?
니들 인생인데 둘 다 야무진데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잘 생각해서 계획 세우고 잘해봐. 쉽게 생각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당신도 이제 그만해. 당신이 손주 나오면 키워줄 거야? 그럴 것도 아니면서.
나도 당신이 애 키우는 거 반대야. 얼마나 힘든데. 병 나.
주변에 아는 사람들 애 키워주다가 허리 아프고 무릎에 손목에
아주 폭삭 늙어버리더라. 젊은 애들이 키워야지
애들이 알아서 잘하겠지. 밥 먹으러 왔다가 괜히 체하겠네.
오랜만에 보는 데 맛있게 먹자. “
“ 회사 그만두고 여기서 집 사서 애 키우고 살면 돼지.
뭐하러 그렇게 생고생해. 너나 지후나
누가 애 키우는 거 쉽댔니? 그러니까 그만두고 애 키우라는 거지. “
더 이상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감정만 상할 것이 빤했다.
지후도 가만히 바닥만 내려다보았다.
어머니는 자꾸만 지후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셨다.
“ 너희들 나한테 할 말 없어?
나 저번 주 토요일에 너희들 설렁탕집에서 밥 먹는 거 봤는데.
지후, 너 은서 일어나지도 못해서 침대에만 누워있다고 하지 않았어?
그래서 현우한테 네 대신 가게 계속 나오라고 했잖아.
둘이 가게에서 소리 지르고 싸우고 해 놓고.
왜 둘이 거기서 다정하게 밥은 먹고 있었니?
동생은 가게에서 일하라고 하고 너는 니 처랑 희희낙락 웃고 놀러 다녔니?
그리고 은서 너 지난달에 내가 너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거 봤어?
얼굴도 까칠하고, 색도 안 좋고, 살도 빠진 것이 너 임신한 거 아니야?
너네들 임신하고 아기 안 낳으려고 하는 거야?
아니면 무슨 짓을 이미 한 거야? 빨리 말해. “
어머니는 얼굴이 벌게 지시면서 빠르게 말씀하셨다.
내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두려워하는 게 보였다.
제발 아니길 아니기를 눈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미 알고 계셨던 것이다. 시아버지는 당황한 듯 놀라서 쳐다보고 계셨다.
사실 대로 말하는 수밖에 없다.
“ 네, 맞아요. 저 임신했었어요.
저번 주 토요일에 산부인과에서 수술했어요.
수술 후에 설렁탕집에 가서 밥 먹었어요.
너무 배가 고팠어요.
아이 상태가 안 좋아서 수술하라고 권해서 했습니다.
한 달 전쯤 어머니가 보셨을 때가 아마 임신 초기였을 때에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고민하다 저번 주 토요일에 수술했습니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하고 상의하지 못해 죄송합니다.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도망치듯 걸어 나가 현관문을 열었다.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죄를 지은 것도 아닌 데,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닌 데 ‘ 왜 나는 더 이상 앉아있지 못했을까? ’
놀란 지후가 나를 쫒아왔다.
놀이터 벤치에 앉아있는 내 옆에 앉았다.
“ 은서야, 엄마랑 아빠가 많이 놀라셨어. 미안해하시는 거 같아.
당황해서 더 이상 말을 못 한 것뿐이지. 이제 이해하실 거야.
우리도 그렇지만 두 분한테도 시간을 좀 드리자. 첫 손주 많이 기다리셨어.
그래서 그러신 걸 거야. 우리가 이해하자. “
“ 그래, 모르고 넘어갔으면 좋았을 텐데. 어떻게 그걸 딱 보셨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었어. 보지 않으셨다면 나는 무덤까지 가져가려고 했어.
여기저기 그런 얘기는 하고 싶지 않아.
그럼 괜히 가버린 아이한테 더 미안해져. “
“ 내가 내일 가게에서 엄마한테 천천히 다 말할 테니까 넌 그냥 가만히 있어. ”
“ 그래, 오빠가 말하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친정식구들은 알 필요는 없어. ”
“ 알아, 무슨 뜻인지. ”
왜 나는 시부모님에게 눈물을 흘리는 내 모습을 보이기 싫었을까?
내 슬픈 마음을 말하고, 위로받기 싫었을까?
회사를 그만두는 것도, 집을 사는 것도,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도
다 부모님과 의논을 하고 결정해야 하나?
결혼을 한 우리가 그런 결정들을 스스로 할 수 없을까?
아직은 어리고 미숙한가? 부모님이 우리보다 더 현명한 판단을 하실까?
도무지 알 수 없는 물음들만 쌓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