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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옥상 소설가 Nov 22. 2020

당신과 함께 한 모든 시간이 좋았다.

“  선생님 저, 제가 수강증을 잃어버렸는데요.  

   관리 선생님이 재발급을 안 해주신데요. 어떻게 해요?  

   겨울방학이라 강의를 3개나 신청했는데......

   수강증을 넣은 바지를 넣고 세탁기에 돌려서 이렇게 돼 버렸어요. “    


세탁기는 찌든 때를 열심히 지우듯

수강증 종이 위의 까만 글자도 파란 도장도 새하얗게 세탁해버렸다.  

중2였던 나는 매몰찬 관리팀 직원의 재발급 불가란 선언에 눈물이 터져버렸다.

부모님이 힘들게 번 돈으로 수강증을 끊었으므로 교육비를 다시 달라는 말을 차마 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할까 고민을 하다

먼지가 폴폴 날리는 종이 뭉텅이만 가지고, 학원 교무실로 달려가 강의를 신청한

선생님께 하소연을 했다.  

선생님의 영어 강의는 타임당 수강생이 2-3 백명이 넘을 정도로 항상 초만원이었고

모든 수업이 마감이어서 수강생은 천명을 훨씬 뛰어넘었다.

그 전까지 한번도 선생님과 인사를 하거나 얘기를 해 본 적은 없었다.

선생님도 처음 본 수강생이 와서 눈물로 하소연을 하니 당황하지 않았을까 싶다.


“  나랑 같이 가자.  ”  


그 당시 학원 원칙상 수강증 분실이나 훼손에 의한 재발행은 불가였지만

선생님은 나와 함께 관리실로 내려가 관리 직원에게 문제가 생기면

자신이 책임을 질 테니 수강증을 재발급해달라고 부탁하셨고

나는 다행히 수강증을 재발급받았다.

선생님의 수고로움에 대한 보답으로 나는 더 열심히 공부했다.

항상 강의실 앞자리는 나와 내 친구의 차지였고

수업 시간에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나 질문이 있으면 쉬는 시간에 질문하거나 따로 교무실로 찾아갔다.

나 때문에 휴식 시간에 제대로 쉬지도 못하셨지만

항상 질문하러 오는 내게 친절하셨고, 계속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해주셨다.  


일 년 동안 선생님의 수업을 반복해서 들었고 열심히 공부했다.

선생님이 좋으니 영어란 과목도 좋아졌고 성적도 올라가

영어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중학교와 고등학교 시절 내내 영어로 고생을 한 적은 없다.

친구들은 예전의 나처럼 쉬는 시간마다 내게로 와서 어려운 영어 문제를

질문해댔고  수능이 끝나자 자신들의 동생들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을 해왔으며

그렇게 영어 과외 알바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첫 직장에서 업무는 내 적성에 맞지 않고,  사람들과의 적응이 어려워 퇴직을 결심했다.

가족들은 조금만 더 다니라며 퇴사를 말렸지만

더 이상 회사를 다니다간 스트레스로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퇴직을 하면 무엇을 하며 돈을 벌어야 하지?  '

생계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엄마와 나는 작은 언니와 형부 조카들과 함께 살았으므로

손을 마냥 놓고 살 수는 없었다.


대학시절 나는 수많은 알바를 했었다.

증권회사, 분식점, 카페, 백화점 판매사원, 의원사무실, 노점, 영어과외

어린 나는 다양한 알바를 하면서

돈을 벌려면 사람의 마음을 얻어야 한다는 원칙을 깨달았고 그 중 가장 많은 돈을 벌었던 과외를 생각했다.

짧은 시간에 많은 돈을 벌게 해주었고, 친구 동생들을 가르치면서 스트레스도 덜 받았던 알바

회사를 그만두더라고 과외를 하면 먹고 살 자신이 있었다.


'  과외를 하면 출, 퇴근 시간도 줄이고, 옷과 화장품 기타 비용도 들지 않고, 시간이 잘 갔어.

  적성에도 잘 맞고, 어쩌면 나는 가르치는 직업이 더 맞을지 몰라.  '


과외를 했던 경험들은 사직서를 낼 수 있도록 나를 과감하게 만들었고,

동네 근처 어학원에 강사를 구한다는 광고에 지원을 해 강사로도 근무를했다.

한가한 오전 시간에는 유치원에 영어 특강 강사로 수업을 나가고, 오후에는 어학원,

주말에는 개인이나 그룹과외를 하면서 강사로의 영역은 계속 넓어져 갔다.

직장을 다닐 때보다 훨씬 편하고 자유로왔고 수입도 좋았다.

선생님으로 인해 영어와 인연이 깊어진 나는 영어 강사가 되었고, 결혼을 해 아이를 기르면서도

경제적인 위기가 있을 때마다 우리를 구해주웠고 먹여 살려주었다.



하지만 선생님은 나의 직업만 준 것이 아니었다.    



중학교 2학년 시절

나는 사춘기를 혹독하게 보내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왜 태어났는지?  

내가 누군가를, 무언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그것을 좋아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나에게서 비롯되었는지?

타인에게 동화되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아닌지?

부모님이나 남이 시켜서가 아니라 내 삶의 주인공으로서 살아가고 있는지?    


밤새 고민하느라 나는 잠을 잘 자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이 생기면 해결이 될 때까지 혼자 시간을 보내는 나는 외로워지기 시작했고

모든 수강생들에게 필수 단어와 숙어를 보내 주셨던 편지봉투에 적힌

선생님의 집 주소로 나의 고민들을 적어 보내기 시작했다.  발송인은 무명이었다.    


선생님이 내 편지를 받았을 쯤이면

수업 시간에 내 고민에 대한 답을 슬며시 내어주셨다.

고민에 대한 답이 항상 나오지는 않았으나

누군가 나에게 애정을 갖고 귀 기울여 준다는 것은 큰 힘이 되었고 위로가 되었다.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사춘기를 보내고 있을 우리가 읽으면 좋은 책,

아름다운 시 한 편, 좋은 글 귀를 읽어주셨다.

그것들은 내 질문과 방황에 대한 그의 답이자 힌트였다.

나와 그의 비밀스러운 고민 상담은 수업 시간 내내 계속되었다.    


어느새

선생님에 대한 나의 감정은 존경과 동경에서 사랑으로 변해가기 시작했고

‘ 선생님 ‘ 에서 ’ 그 ‘ 로 명칭은 변경되었다.

그가 읽으라고 권해줬던 책들은 대부분이 어렵고 두꺼운 고전들이었지만

바로 서점으로 달려가 구입하고 읽으려 애썼다.

그가 읽었던 경험했던 모든 것들을 나도 경험해보고 싶었다.   



고등학교로 진학해

더 이상 학원에 다닐 이유가 없어져 더 이상 선생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학업문제, 대학의 과 선택, 교우 관계 등의 문제가 생기면 항상 선생님에게 편지를 보냈다.

답장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선생님에게 고민을 적어가며     

‘ 선생님이라면 이렇게 대답을 해주시겠지 ‘ 라 짐작하며 마음을 다스리고 다잡아 나갔다.

중, 고등학교 시절 내내 편지, 일기, 라디오로 혼란스러운 시간들을 내 방과 나의 옥상에서 해결해 나갔다.    


 나는 점차 발칙하고 대담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수능이 끝나고 대학입시를 마무리 지으면

살도 빼고 상큼한 신입생으로 변신해 그 앞에 가서 5년 동안의 무명 편지 발신인은 나였으며

나의 연인이 되어달라는 고백을 하기로

얼른 대학입시가 마무리되기를 바라며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 매일 앉아서 먹고 공부만 하던 나는 살이 쪄서 열심히 다이어트를 하고  

대학교에 입학해 신입생 티를 벗어갈 무렵

살도 빠지고 제법 예쁘다는 말도 들어 남학생들의 러브콜을 받자

때가 왔음을 절감하고 그에게 갈 준비를 하고 그가 근무했던 학원으로 전화를 했다.    

더 이상 그 학원에서 근무하고 있지 않다는 직원의 안내에 절망했지만 그대로 포기할 내가 아니었다.


수소문을 해 그가 가르치고 있다는 다른 학원으로 가

수업이 모두 끝날 10시쯤

학원 문 앞에서 그에게 선물할 안개와 장미꽃 한 다발을 안고 기다렸다.    

마침내 계단을 내려오는 그의 어렴풋한 형체가 보이자

내 심장은 터질 것처럼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  선생님  ”


내 입 밖으로 나오기도 전에 이미 그의 이름이 누군가에 의해 불렸다.

고개를 돌려 소리의 시작점을 바라보니 한 아가씨가 서있었다.    

나와 비슷한 또래일 것 같은 그녀


“  ** 야  ”


그는 그녀의 이름을 자연스럽게 부르고, 둘은 그들만의 거리를 걸어갔다.

행복의 아우라로 그들이 걸어가는 어두운 거리는 밝아지기 시작했고

그와 그녀가 밝히는 빛으로 인해 내 눈은 시어져 눈을 감아야만 했다.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  

저녁무렵 피곤해 무거워졌을 그들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고 있다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용감했던 것은 나뿐이 아니었다.

나 대신 그의 이름을 불렀던 그녀는 나와 비슷한 나이였고,

그의 학생이었던 그녀는 대학생이 되어 그에게 사랑을 고백을 했다.

나이 차를 고민했던 그가 마침내 그녀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연인이 되었다는 것을 친구로부터 듣게 되었다.

그에게 주려고 했던 꽃다발은 내 방, 꽃 병 안에 그대로 꼽혔다.

그 꽃들이 시들어 떨어질 때까지


그에 대한 배신감으로, 그녀에 대한 분노로 며칠 밤을 울어대다

문득  

첫사랑을 얘기해달라던 여중생들의 성화에 못 이겨

놓쳐버렸던 첫사랑 그녀를 얘기를 하면서 눈물이 글썽거렸던 여리고 착했던 예전의 그를 기억해냈다.    


다시 찾아간 그에게서 눈물의 흔적도 아픔의 흔적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녀는 그에게서 사랑의 아픔을 지워 낸 것이다.

행복해하는 그의 얼굴에서 기쁨의 빛이 사라지지 않기를

순수하고 소년 같은 그를 그녀가 지켜 주길 바랬다.    

시작도 혼자, 마지막도 혼자.  짝사랑이자 첫사랑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결혼 후 서점에서 책을 보다 표지에 낯익은 이름을 발견했다.  

나의 ‘ 그 ’이다.

그때 그 수업 시간에 말한 대로 그는 작가가 되었다.

지금도 책을 내고 있고, 세바시나 티비에 종종 나와 나의 ' 그 ' 를 볼 수 있다.

그는 꿈을 이루었고 그녀와 결혼해 딸을 낳아 살아가고 있다.

한 동안 그가 아팠고, 죽음의 문턱까지 이르렀을 때도 그녀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고,  그가 꿈을 이루어내도록 힘이 돼 주었다고 했다.    




안도했다.  

그녀가 그의 옆에 있어주어서

다행이었다.  

용감했던 그녀가 나보다 먼저 그의 이름을 불러주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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