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다운 어른

<모브사이코 100> 레이겐 아라타카

by 스니


어릴 적 재밌게 보았던 애니메이션을 다시 찾아보면 늘 어딘가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분명 재미는 있는데, 마음 한편이 편치 않았다. 특히 히어로물을 볼 때마다 느껴지던 이 불편함의 실체는 금방 드러났다. 어른이 된 내 눈에, 더 이상 어른이 아닌 '어린이'가 세상을 구하는 모습이 마냥 즐겁지만은 않았던 것이다.


우리가 어릴 적 보았던 주인공들은 대개 초등학생에서 고등학생 사이다. 그 어린 친구들이 때때로 목숨을 걸고 결연하게 세상을 구하는 걸 보고 있자니 문득 혼란스러웠다. 아이들이 생명의 위협을 무릅써야만 유지되는 세계라면, 차라리 종말을 맞이하는 게 옳지 않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니까. 타깃 시청층의 공감을 위해 주인공의 연령대가 낮다는 건 이해하지만, 어른의 눈으로 본 그 세계 속 어른들은 비겁해 보이기까지 했다.


저 총체적 난국에 이르기까지 어른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어른의 등장


이런 불편함 때문에 히어로물을 멀리하던 나를 다시 끌어당긴 작품이 있었다. 바로 작년에 시즌 3으로 완결된 애니메이션, <모브사이코 100>이다.


주인공 카게야마 시게오(모브)는 중학교 2학년이다. 내가 실컷 불평했던 '세상을 구하는 중학생' 설정에 딱 들어맞는다. 심지어 시게오는 세계관 최강자급 초능력자라 수시로 거대한 악에 맞선다. 그럼에도 내가 이 작품을 사랑하게 된 이유는 주인공의 스승이자 영능력자인 레이겐 아라타카의 존재 때문이다.


레이겐은 영능력자라기보다 입담이 화려한 사기꾼에 가까운 캐릭터다. 제령 상담소를 운영하지만 정작 본인은 영을 보지도 못하고, 위기 상황에선 초능력자인 제자 시게오를 불러 해결한다. 언뜻 보기엔 믿음직스럽지 못한 인간상이지만, 역설적으로 레이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어른다운 어른'이다. 시게오가 위험한 일에 휘말릴 때마다 레이겐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시청자인 내 마음은 불편함 대신 든든함을 느꼈다.


히어로의 고충은 그에게 '도망'이나 '외면'이라는 선택지가 없다는 데 있다. 히어로가 물러나는 순간 치러야 할 희생이 너무나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고 싶고 안전하고 싶은 건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다. 히어로는 늘 그 욕구를 희생하도록 강요받는 존재이며, 그 무거운 짐을 아직 보호받아야 할 아이들이 짊어지곤 한다.


시게오 역시 매 시즌 이런 압박에 직면한다. 악당 집단 '손톱'을 상대하며 모두가 "너라면 해결할 수 있어!"라고 시게오의 능력을 기대할 때, 오직 레이겐만이 다른 말을 건넨다. 원치 않는다면 도망쳐도 된다고. 이후 이어지는 전개는 경이롭다. 시게오는 후련한 얼굴로 도망을 택하며 레이겐에게 잠시 힘을 빌려주고, 레이겐은 그 힘으로 위기를 해결한다. 이때의 레이겐은 어쩐지 분할 정도로 멋있다.





어른다운 어른


레이겐은 어린 히어로에게 선택지를 만들어주는 어른이다. 초능력을 조절하지 못해 두려워하던 어린 시게오에게 '사람에게는 능력을 쓰지 않는다'는 방향성을 제시해준 것도 그다. 이 소박하지만 위대한 원칙은 시게오가 괴물이 아닌 '선량한 히어로'로 성장하게 만든 단단한 뿌리가 되었다.


물론 레이겐은 완벽한 성인이 아니다. 제자를 싼 임금으로 부려 먹기도 하고, 오랫동안 자신을 영능력자라고 속이기도 한다. 분명 고약한 면이 있는 어른인데도 미워할 수 없는 이유는, 그가 사회에 찌들어 시니컬한 주제에 기어코 '다정함'을 잃지 않아서다. 레이겐을 보며 확신하게 되었다. 어른이란 자기보다 약하고 어린 이에게 마땅히 다정함을 내어줄 수 있는 존재여야 한다는 것을.


레이겐은 자기보다 어리거나 약한 이들에게 기꺼이 져준다. 시게오의 부담을 대신 짊어지고, 악당의 소굴에선 아이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하며, 때로는 자신의 초라한 진실을 솔직하게 드러내면서까지 아이들을 보호한다. 초능력도, 돈도, 대단한 배경도 없는 이 평범한 29살 남자가 그 어떤 능력자보다 강해 보이는 이유다.






불완전하기에 가능한 성장


미성숙한 존재는 보호받아야 마땅하다는 레이겐의 철학 덕분에, 시게오는 '나'를 찾아가며 바른 청소년으로 성장한다. 레이겐은 거창한 구원자가 아니다. 그저 어른으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고민을 들어주고, 도덕적인 선택지를 제시하는 것—를 다할 뿐이다.


동시에 레이겐은 어른 또한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캐릭터다. 그는 현란한 말솜씨 뒤에 고독과 서툰 진심을 숨긴 아웃사이더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두려움을 무릅쓰고 자신을 던질 줄 안다. 시즌 2의 기자회견이나 시즌 3에서 폭주하는 모브를 막기 위해 달려가는 모습은, 어른의 성장이 얼마나 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지 보여준다.


그는 제자를 성장시켰고, 동시에 제자로 인해 고독에서 벗어나며 성장했다. 레이겐은 완벽해질 필요 없이, 그저 어제보다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어가는 가능성을 온몸으로 응원한다. 마땅히 나서야 할 때 나서고, 바뀌어야 할 때 바뀔 줄 아는 그의 모습은 내가 본 그 어떤 히어로보다 이상적인 어른의 표상이었다.





내가 되고, 어른이 된다는 건


모브 사이코 시즌3 마지막화


<모브 사이코 100>은 초능력자 카게야마 시게오가 '공갈 스승님' 레이겐과 제령 활동을 하며 자아를 확립해가는 과정을 그린다. 아웃사이더였던 소년이 '나'에서 '우리'로 나아가는 신체적, 정신적 성장은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따뜻하다. 주인공 시게오가 적과 아군을 가리지 않고 주변을 변화시키는 주된 이야기 속에서도, 내 시선은 유독 작중 몇 안 되는 성인인 레이겐에게 머물렀다.


어린 제자를 구원하고, 다시 그 제자에게 똑같이 구원받는 스승. 이토록 기묘한 수평적 유대를 보여주는 레이겐 아라타카는 시청하는 내내 내게 틈틈이 질문을 던지는 듯했다. "넌 말이야, 어른이 뭐라고 생각해?"라고 말이다. 이 글을 통해 내 안의 레이겐을 소화하며 비로소 깨닫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단순히 나이를 먹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진정한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레이겐이 보여준, 단순해 보이지만 실은 아주 어려운 조건들을 지켜내야 한다.


나보다 어리거나 약한 이에게 최선을 다해 다정할 것. 설령 그게 거짓일지라도, 친절을 포기하지 말 것. 그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고 용기 내어 잡을 것. 그리고 나의 부족함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것. 그리하여 완벽함보단 나아감에 집중할 것.


우리는 언제나 어제보다 더 나은 모습으로 변할 수 있으며, 원하는 만큼 성장할 수 있는 존재다. 그 사실을 잊지 않고 살아가는 것 또한 어른의 몫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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