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능은 꽃피우는 것

<하이큐!!> 오이카와 토오루

by 스니



내가 유구하게 애정해 온 장르가 있다. 바로 성장물, 청춘물, 그리고 스포츠물. 어떤 작품이든 이 세 장르 중 하나에만 속해도 나는 높은 확률로 그 세계와 사랑에 빠지곤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장르를 완벽하게 아우르는 작품이 있으니, 바로 애니메이션 <하이큐!!>다.


’배구 강호였던 과거의 영광을 되찾으려는 카라스노 고교의 좌충우돌 전국대회 도전기.‘ 45권의 원작과 4개 시즌의 애니메이션을 아주 불친절하게 요약하자면 이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고작 이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에 <하이큐!!>는 너무나 다정하고 건강한 스포츠물이다. 이 작품은 주조연을 가리지 않고 모든 인물의 이야기를 세심하게 다룬다. 각자가 정의하는 배구의 의미와 관계성을 풀어내고, 엮고, 맺어주는 과정을 통해 그들이 배구를 얼마나 절실하게 사랑하는지 증명한다. 덕분에 캐릭터들은 청춘을 공유하고, 시청자들은 그 성장에 온 마음으로 공감하게 된다.


개별 서사가 이토록 단단하니, 단순히 주인공이 아니라는 이유로 누군가를 엑스트라로 치부할 수 없게 만든다. 아마 팬들에게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가 누구냐고 묻는다면, 정말 다양한 이름이 나올 것이다. 그만큼 <하이큐!!>는 독립적이고 개성 넘치는 인물들로 가득하다.






출처: 하이큐!! 더 세컨드



그 수많은 인물 중 내가 가장 아끼는 주인공은 아오바죠사이 고교의 주장, 오이카와 토오루다. 그를 좋아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배구를 너무나 사랑해서, 배구에 온 힘을 다해 간절함을 쏟아부은 선수이기 때문이다. 배구광들이 트럭째로 쏟아져 나오는 이 작품에서도 오이카와의 애정은 유독 집요하고 절절하다. 자신을 고통과 한계 속으로 몰아넣을지언정 결코 포기하지 않는 그 간절함은, 보는 이로 하여금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절망에서 핀 꽃


"才能は開花させるもの, センスは磨くもの!"

재능은 꽃피우는 것, 센스는 갈고닦는 것! 


스포츠는 몸을 쓰는 분야인 만큼 타고난 재능이 절대적이다. 기술뿐만 아니라 타고난 신체 조건마저 천부적이어야 비로소 천재라 불린다. 이런 세계에서 천재는 누군가에겐 선망의 이정표이지만, 쫓기는 이에겐 언젠가 승기를 내주어야 할 절망의 벽이다. 승리가 기본값인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 우리는 대개 천재 주인공의 승리에 환호하느라, 패자의 뒷모습에 담긴 사정까지는 궁금해하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뛰어난 세터로 각광받으면서도 중·고교 시절 내내 '패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숙적 시라토리자와에 가로막혀 단 한 번도 전국대회에 나가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누구나 그를 우수한 세터라 칭송했지만, 정작 오이카와는 알고 있었다. 스포츠 세계에선 결과로 증명하지 못하면 결국 잊힌다는 것을. 실제로 훗날 오이카와를 기억하는 이들은 오직 고교 시절 그와 맞붙어본 자 들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말 그대로, 절망에서 피어난 꽃이었다.






진흙투성이가 될지라도


출처: 시즌 2


오이카와는 주인공도, 주인공과 같은 팀도 아니다. 냉정히 말해 주인공의 성장을 위한 '거대한 벽'으로 소모되고 퇴장할 수도 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그는 밤을 새워 상대의 경기 영상을 분석하고, 쉼 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성장을 갈구한다. 이런 오이카와의 서사는 원작의 말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출처: 원작



"나보다 뛰어난 무언가를 갖고 있는 인간은 태어난 시점부터 나와는 다르며, 그걸 뒤집는 일은 아무리 노력하고 연구해도, 혹은 어떤 동료를 갖고 있어도 불가능하다고 한탄하는 것은 모든 정당한 노력을 다하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아. 단, '내 힘은 이 정도가 아니다'라고 믿고 한결같이 똑바로 길을 나아가는 것은 '나는 천재와는 다르니까'라고 한탄하고 체념하는 것보다 훨씬 힘과 괴로운 길일지도 모르지만."
- 호세 블랑코


" 재능을 꽃피울 기회를 잡는 건 오늘일지도 몰라. 혹은, 내일이나 모레, 아니면 내년일까. 30살이 되고 난 뒤일지도. 하지만 없다고 생각하면 아마 평생 없을 거야." - 오이카와 토오루



포기의 갈림길에 서 있던 오이카와에게 스승 호세 블랑코는 말한다. 모든 정당한 노력을 다하기 전까지는 재능의 유무를 판단하지 말라고. 오직 배구를 사랑하기에 천재들에게 꺾이고 싶지 않았던 오이카와는, 열아홉이라는 나이에 아르헨티나행이라는 험난한 길을 선택한다. 비록 지금은 벼랑 끝에 서 있을지라도, 아직 꽃 피우지 못한 자신의 재능을 기필코 증명해 내겠다는 의지였다.





패자에서 승자를 향해


" 힘들지 않으면 노력하지 않은 것과 다름없다는 믿음 같은 것도 있다. 하지만 그런 것과 상관없이 때때로 즐거움은 불쑥 찾아온다. 즐거움이 나를 끌어당긴다. 배구가 즐겁다는 것을 잊었다가 다시 떠올린다."


성인이 된 후 브라질에서 우연히 재회한 히나타와 비치발리볼을 하며, 오이카와는 다시금 깨닫는다.


배구가 즐겁다는 것.


노력하는 건 언제나 힘들지만, 배구가 너무 재밌고 즐거워서 계속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건 타지생활에 지친 히나타도 마찬가지였다. 고교시절 서로 달가워하지 않았던 동향 선후배는 그렇게 서로의 꿈을 응원하는 동료가 된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충을 이해했다. 머나먼 타지에서 꿈 하나만 보고 버틸 때, 얼마나 자주 마음이 무너지고, 무너진 만큼 일어나야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출처: 원작


결국 오이카와는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세터가 되어 돌아온다. 자신을 좌절시켰던 일본이라는 무대에, 한때 절망이었던 '괴물 세대'들을 적으로 마주하며 세계 정점에 선 것이다. 그는 남들보다 조금 먼 길을 돌아오느라 흙투성이가 되었을지언정, 끝내 자신만의 결승선을 통과했다.


그래서 오이카와의 성장이 눈부시고 아름답다. 타고난 천재의 성공보다, '우수함'에 머물러야 했던 노력가가 기어이 정점에 도달하는 서사가 우리에게 더 큰 희망을 주기 때문이다. 그러니 좋아하는 마음이 절망에 패배해 꺾이지 않기를. 오이카와가 보여주었듯, 포기하는 게 죽기보다 힘든 꿈이라면 마음 단단히 먹고 끝까지 해내면 된다. 좋아하는 일을 포기해야 할 유일한 이유는,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마음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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