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피스> 포트거스 D. 에이스
" 나는 해적왕이 되고 말 거야!"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시그니처 대사가 울려 퍼지는 <원피스>를 정주행했다. 원작 기준 단행본 111권까지 이어진 이 거대한 서사 속에는 수많은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존재하고, 나 역시 항해를 함께하며 많은 인물을 사랑하게 되었다. 그중에서도 유독 내 마음을 붙잡고 몇 번이고 되새기게 만든 인물이 있었으니, 바로 루피의 형인 포트거스 D. 에이스다.
짧지만 뜨거운 삶을 살다 떠난 에이스는 작품에서 일찍 퇴장했음에도 잊을 만하면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야기가 결말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려가고 있는 지금, 독보적인 서사로 기억되는 에이스의 삶을 짚어보고 싶어졌다. 특히 그의 '꿈'에 대해서 말이다. <원피스>는 꿈꾸는 자들이 바다로 나와 항해하는 낭만의 이야기다.
그렇다면 에이스는 이른 죽음을 뒤로하고, 그 끝에 다다랐을까?
에이스는 자기 존재의 정당성을 증명하고자 평생을 투쟁한 인물이다. 그 투쟁의 배경에는 가혹한 출생의 비밀이 자리한다. 그의 아버지는 대해적시대를 열어젖힌 악명 높은 해적왕 골 D. 로저. 어린 시절, 에이스는 아버지를 향한 사람들의 원망과 혐오를 가감 없이 접하며 자기 존재에 대한 깊은 회의감을 느꼈다.
"나는 태어나도 괜찮았던 걸까?"
오랜만에 그를 찾아온 양할아버지 가프에게 어린 에이스가 물었던 질문은 에이스가 품고 있던 혼란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처형대의 한마디로 세상을 혼란에 빠뜨렸고, 어머니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산달을 한참 넘기며 버티다 목숨을 잃었다. 그의 탄생은 환영받지 못했다. 일이 너무 바쁘고 서투른 가프는 '살아가다 보면 알게 된다'며 에이스에게 훌륭한 답을 주지는 못했지만, 본인의 손자인 루피를 데려와 함께 성장토록 한다.
에이스는 스스로를 '괴물'이라 여겼다. 로저의 핏줄을 향한 세상의 저주 속에서, 그는 "너는 존재해도 괜찮다, 네가 필요하다"는 믿음이 절실했다. 에이스는 단지 로저의 아들이 아닌, '포트거스 D. 에이스'라는 독립적인 존재로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기 위해선 반드시 아버지의 명성을 넘어서야만 했다.
자신을 탐탁지 않게 여긴다 생각한 다단 산적단에 에이스는 오래도록 마음을 열지 않았다. 그런 그가 처음으로 마음을 내준 존재는 동갑내기 친구 사보였다. 두 사람은 해적을 꿈꾸며 서로를 의지했고, 이후 루피라는 동생이 생기며 의형제를 맺게 된다. 혈연보다 강한 유대로 묶인 삼 형제는 에이스에게 삶의 이유가 되었다. '사보와 루피가 아니었다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에이스의 고백처럼, 형제는 그에게 구원이었다.
에이스가 루피에게 완전히 마음을 연 순간을 보면, 그의 진정한 꿈이 명성이 아닌 '증명'이었음이 명확해진다. 자신을 끈질기게 쫓아다니던 루피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었던 날, 에이스는 묻는다.
"내가 있으면 안 괴롭단 말이지... 내가 없으면 곤란하다, 이거네. 넌 내가, 살아 있기를 바라는 거냐?"
당연하다는 루피의 외침. 자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고, 자신이 살아있기를 바라는 존재의 등장. 에이스는 그렇게 루피를 친동생처럼 아끼게 된다. 불의의 사고로 사보를 잃은 뒤에는 동생을 위해 더 강해져야 했고, 무모한 루피를 위해 더 다정하고 예의 바른 형이 되고자 노력했다. 자기를 필요로 하는 존재를 다시는 잃지 않기 위해서.
외전 <노블 에이>에서 동료 듀스는 에이스를 '태양과 같은 사내'라고 표현한다. 에이스는 누구든 곁에 머물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었다. 이는 루피와 닮은 점이지만, 에이스에겐 루피에겐 없는 세심한 '눈치'와 배려가 있었다.
그가 태양 같았던 이유는 이글이글 열매의 능력 때문만이 아니다. 그의 성품에서 나오는 따뜻함이 사람들을 모았다. 스페이드 해적단 시절 그의 동료들은 하나같이 외골수에 특이했는데, 에이스는 그들의 꿈을 모두 포용할 수 있는 선장이기도 했다. 이렇게 예민했던 어린 시절과 달리 유쾌하고 호방하게 성장한 그는, 적이었던 해군이나 칠무해조차 영입을 탐낼 만큼 매력적인 사내였다.
그의 다정함은 죽음 이후에도 이어졌다. 와노쿠니에서 맺은 인연들은 에이스가 남긴 희망과 꿈을 품고 버텼으며, 결국 에이스의 의지를 이은 루피에 의해 그 꿈을 이루게 된다. 에이스는 자신을 기꺼이 불태워 남의 인생을 비추는 남자였다.
하지만 가까운 이들만 아는 에이스의 치명적인 결핍이 있었다. 모두를 비추면서도 정작 자신은 '사랑받아서는 안 될 존재'라 여겼다는 점이다. 명성이 높아질수록, 로저의 이름이 들려올수록 에이스는 과거의 굴레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기이할 정도로 빠르게 높아지는 현상금을 볼 때마다, 해적왕의 언급이 들릴 때마다, 에이스는 그의 아버지 골 D. 로저의 업보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런 에이스를 품어준 것이 바로 사황 흰 수염이었다. 참패 속에서도 덤벼드는 에이스에게 흰 수염은 자기 아들이 되라며 손을 내민다. 자신의 이름을 업고 마음껏 날뛰어 보라는 그 품 안에서, 에이스는 비로소 안식처를 찾는다. 흰 수염은 자신이 로저의 아들이라고 밝힌 에이스에게 '그를 닮지 않았다'라고 재밌어하고, 적의 자식을 아들로 삼을 수 있냐는 그의 새로운 아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밝힌다.
"누구한테 태어났든 인간은 모두 바다의 자식이다!"
그렇게 흰 수염에게 깊은 위안을 얻어서 흰 수염 해적단이 된 에이스는 지독하게도 자기를 괴롭힌 아버지의 악명에게서 벗어날 기회를 얻게 된다. 그의 두 번째 가족들 품에서 로저를 아버지로서 부정하고, 흰 수염을 그의 유일한 아버지로 여기면서 바다의 자식이 된다.
에이스는 자신을 품어준 흰 수염 해적단을 진심으로 사랑했다. 동생의 꿈을 누구보다 응원하면서도, 루피를 만났을 때 흰 수염을 해적왕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할 만큼 그는 아버지에게 감화되어 있었다. 흰 수염은 그에게 아버지라는 이름의 트라우마를 지워준 거대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에이스는 동료를 죽이고 도망친 티치를 묵인할 수 없었고, 아버지를 모욕하는 사카즈키의 도발에 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흰 수염이 부정당하는 것은, '바다의 자식'으로서 간신히 성립한 에이스 자신의 정체성이 부정당하는 것과 같았을 테다.
처형대 위에서 끝까지 흰 수염만이 유일한 아버지라 고집하던 그는, 자신을 구하기 위해 전쟁에 뛰어든 가족들을 보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이들. 에이스는 죽음 직전에서야 자신이 얼마나 깊고 무거운 사랑을 받고 있었는지 깨닫는다.
"내가 정말 원했던 건, 아무래도 '명성' 따위가 아니었어....
난 '태어나도 되는 것이었을까?' 원했던 건... 그 답이었어.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네가 나중에 모두에게 전해줘. 아버지!!! 모두들!!! 그리고 루피...
오늘까지 이렇게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나를, 악귀의 피를 이어받은 나를!!
사랑해 줘서... 고마워!!!"
루피를 대신해 죽음을 맞이하며 남긴 이 유언으로 우리는 에이스의 진정한 꿈을 알게 된다. 그의 항해는 이름을 떨치기 위함이 아니라, 평생 자신을 괴롭힌 질문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나는 태어나도 괜찮았던 걸까?"
어린 에이스가 가졌던 자기 존재에 대한 의문은 평생 그의 내면에서 떠나지 못했던 거다. 그래서 그는 은연중에 태어나도 괜찮았다는 증명을 찾기 위해 드넓은 바다를 항해했다. 바다를 항해하고, 사람들을 사귀고,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고 살아가기 위해 그는 그렇게 자신의 삶을 그 누구보다 치열하게 투쟁해 왔다. 그리고 그가 얻은 답은 그를 위해 목숨을 걸어준 사람들 덕에 찾게 된다.
사랑받았다. 그가 살아주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사랑 덕에 에이스는 죽음의 직전, 그를 가장 처음으로 필요하다 말해준 남동생 품에서 그 꿈의 정답을 찾고 눈을 감는다. 물론 그가 후회 없이 떠난 것은 아니다. 루피가 꿈을 이루는 모습을 지켜보지 못한 걸 아쉬워하며 떠나야 했으니까.
그러나 에이스는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웃으며 눈을 감았다. 이제야 진정 살고 싶고, 사랑을 온전히 받을 수 있으며, 존재의 의미를 찾아낸 순간 맞이한 죽음이 아쉽고 슬펐음에도 웃었다. 그게 혹여 자신을 안고 있는 루피를 달래기 위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에이스는 당당히 흰 수염의 아들이자 루피의 하나뿐인 형 포트거스 D. 에이스로 생을 마감했다. 아들을 지켜준 아버지로부터 보호를 받고, 동생을 지켜줘야 하는 형으로서 구하고, 그를 사랑해 준 모두에게 감사를 전하며.
사카즈키의 도발에 넘어간 에이스를 비판하는 시선도 존재한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가장 에이스다운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샹크스가 회상했듯, 동료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끝까지 맞서던 로저의 피는 아이러니하게도 에이스의 긍지가 되었다. 설령 결과가 비극일지라도 에이스는 결코 등을 보이고 도망칠 사람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에이스의 뒤엔 지켜야 하는, 사랑하는 동생 루피가 있었다. 에이스에겐 죽은 사보와의 약속도 있었고, 그의 타고난 천성이 등 뒤에 지켜야 하는 상대가 있다면 더더욱 도망가지 않고 맞서는 거였기에, 그가 은혜를 입은 아버지가 모욕당하고, 동생이 위험에 처했을 때 이미 그의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맞서는 것. 설령 모두의 노력이 물거품이 될지라도, 에이스는 도망갈 수 없었다.
원피스를 보면 꾸준히 의지를 잇는 자들이 나타난다. 흰 수염과 에이스가 죽자, 흰 수염 해적단은 흰 수염의 명령과 에이스의 염원을 받아들여 루피를 에이스의 의지라 부르며 구출하는데 전력을 다한다.
약자를 보호하던 태양 같은 마음, 자유를 향한 갈망. 에이스의 의지는 루피가 이어가고 있다. 원피스를 보는 모두가 다음 해적왕이 누구인지 밀짚모자 일당만큼 확신하는 지금, 루피는 에이스가 보지 못하더라도 그에게 당당히 말했던 자신의 꿈을 이루리라. 그 꿈을 들었을 때부터 그의 곁을 떠난 이후에도 에이스가 기대하고 응원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