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하고 슬펐던 가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시간이 멈춘 듯 멈추지 않고 쏜살같이 지나갔다.
때로는 시간에 갇혀있는 것 같았고, 다 떨어져 버린 낙엽들을 보고는 훅 지나간 시간들에 깜짝 놀라곤 하였다.
10월 26일, 49재 막재를 지내고 돌아왔다.
7번의 재를 지내러 절에 갈 때마다 날씨는 늘 화창하였고, 선선한 바람은 켜진 촛불을 가볍게 일렁이게 하였다.
2시간 넘게 재를 지내며 할아버지를 떠올리고 그리워하다가 의식이 끝나고 밥을 먹으며 가족들이 한데 모여 웃음꽃을 피울 때면 슬픔이 점점 걷히고 마음에 사랑이 움트는 것 같았다.
12년간 병상에 누워 계셨던 할아버지께 하지 못한 말들이 너무 많았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전하지 못한 말들과 마음들이 넘쳐났고 이 마음을 어떻게든 할아버지께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7번의 재를 지낼 때마다 할아버지께 편지를 썼다.
슬퍼하는 엄마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그리고 할아버지를 위하여.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저 미리예요.
마지막 재를 남겨두고 할아버지께 마지막 편지를 적어요.
늦여름부터 시작하여 저물어가는 가을 끝자락까지 계속해서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보냈어요. 계절이 흘러가는 것을 문득문득 느끼며 할아버지의 삶은 어떠셨을지 가만히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지난 12년간 병상에 누워계시며 흘려보내신 수많은 계절동안 할아버지는 어떤 말씀을 하시고 싶으셨을까,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어떤 것들을 하고 싶으셨을까, 궁금해요.
할아버지께서 미처 전하지 못한 말들과 마음들을 저희가 다 헤아리지 못할까봐 그 뜻대로 살지 못할까봐 걱정도 되지만,
말하시지 않아도 듣지 못했어도 그 마음과 진심은 통할 거라고 믿어요.
자식들에겐 엄하고 무서운 아버지셨지만 늘 바른 길로 가기를 바라시고 사랑하는 마음이 깊으셨던 할아버지의 진심을 알아요.
서로에게 닿지 않았을지라도 쏟아낸 진심과 사랑은 지문처럼 남아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그 마음들을 지금은 정확히 느끼지 못할지라도 돌고 돌아서라도 틀림없이 꼭 자식들에게, 손주들에게 닿을 거라고 믿어요.
그래서 할아버지가 주신 사랑도, 저희가 보낸 진심과 사랑도 언젠가는 가닿아 감사한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이 더할수 없이 커져 사무치게 할아버지가 보고싶은 날이 올 것 같아요.
할아버지, 7주 동안 이렇게 할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사랑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할아버지를 뵈러 가는 7번의 토요일은 마치 선물 같았어요. 할아버지가 지켜주시는 것처럼 날씨가 늘 좋았고, 가는 길에는 소풍을 떠나는 것처럼 기분이 좋았고, 재를 끝내고 밥을 먹으며 온 가족이 모여 웃음꽃을 피울 때면 꼭 할아버지가 선물을 주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그래서 한 주 한 주 시간이 흐를수록 슬픔이 감사함이 되고 감사함은 사랑이 되어 슬프지만 마냥 슬프지만은 않게 할아버지를 보내드릴 수 있도록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시간들이었어요.
그럼에도 마지막을 앞둔 지금은 미련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꽉 붙들고 싶을 정도로 또다시 슬픔이 밀려오고 할아버지와 조금이라도 더 함께 하고 싶지만, 이 이별의 끝에 새로운 만남이 있다고 믿으며 눈물없이 언젠가 만날 그날을 기다리며 할아버지를 보내드리려 해요.
봄이 되어 새싹이 움트고 나비가 날아다니면 할아버지가 생각날거고, 여름이 되어 큰 나무의 그늘에서 잠시 숨을 고를 때면 또 할아버지가 보고싶겠지요. 가을이 되어 가을바람의 냄새가 나고 낙엽이 떨어지면 오늘 이 순간이 생각나 또 할아버지가 떠오를거고, 겨울이 되어 눈이 내리면 할아버지가 오셨다고 생각하게 될 것 같아요.
이별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래요. 항상 모든 순간, 어느 곳에서든 할아버지를 떠올리며 할아버지께 부끄럽지 않도록 저희 모두 바르고 선하게 살아갈게요.
할아버지가 물려주신 기개와 용기로 선과 악을 바르게 구별하여 앞으로 펼쳐질 많은 일들 잘 헤쳐 나가겠습니다.
궂은 길에서도 저희 가족 모두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며 앞으로 잘 나아갈거고,
비바람을 맞게 되면 서로를 감싸주며 그 힘든 시간 또한 잘 이겨낼게요.
할아버지가 저희에게 주신 7주의 시간동안 저희는 더욱 단단해졌고 화합하였고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돌아보며 더욱 끈끈해졌어요.
할아버지, 저희 엄마, 삼촌, 이모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서 저희 손주들이 이렇게나 멋지고 대단한 엄마, 아빠의 딸과 아들로 태어날 수 있었어요.
엄마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마음 잊지 않고 늘 옆에서 힘이 되는 미리가 될게요.
그러니 할아버지, 막둥이의 꾹꾹 참아내는 눈물과 응어리졌던 마음들 사랑으로 거두어주시고 마음 편히 떠나가세요.
오늘따라 어릴 적 할아버지께 안겨 토닥임을 받던 그때의 너른 품과 따뜻한 손길이 생생하게 떠올라 그리우면서도 마음이 따뜻해져요.
할아버지, 그동안 고생 많으셨어요.
편히 쉬세요.
사랑합니다.
-할아버지를 사랑하고 존경하는 외손녀-
미리 올림
마지막에 의식을 치렀던 종이 휘장과 할아버지의 사진, 그리고 나의 7개의 편지를 함께 태웠다.
너무나도 찬란하게 빛나는 가을볕과 청량한 하늘 아래서 타버리는 것들을 바라보며 쓸쓸함과 허무함이 밀려들었지만,
한편으로는 50여 명이 모여 막재를 지내고 할아버지가 가시는 마지막 길을 함께 하는 것에 우리 할아버지가 이 모습을 보시고 참 행복해하시겠구나, 편안히 가실 수 있겠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재를 지내러 가는 모든 날들이 소풍 같고 선물 같았다.
7주 동안 충분히 그리워하고 슬퍼하고 사랑할 시간을 할아버지가 선물해주신 거라고 생각하며 늦여름부터 가을의 끝자락까지 할아버지를 생각하며, 가족들과 더 끈끈해지는 시간을 가졌다.
어느 날 갑자기 문득문득 슬픔이 몰려오겠지만
이 슬픔 또한 사랑으로 이겨내고,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기를 바라게 되고 또 그럴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강해지는 시간들이었다.
재를 지내며 할아버지께 기도하고 바라는 게 많았던 나는 점점 마음이 비워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내 마음을 애써 꾸며 말하지 않아도 다 알아주시겠지 하는 마음으로 할아버지 사진을 눈에 한가득 담았고, 할아버지가 마음 편히 가시는 게 나의 소원이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소원이 이루어진 것 같다.
너무나도 날이 좋고 눈부셔서 찬란하고
찬란해서 슬픈 가을이었다.
하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모든 계절 모든 곳에서 어떤 형태로든
그리운 이를 떠올리고 만나게 될 것이고
그리움은 곧 사랑이 될 것이라는 걸 알기에...
슬퍼도 슬프지만은 않은
그리워도 그립지만은 않은
수많은 형태의 사랑이 스며드는 계절이었다고 마음에 새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