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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영 Aug 27. 2024

초대받지 않은 나의 삶 속에서

거미의 실존


나는 저 엄숙하고 괴로워하는 대지에 숨김없이 내 마음을 바쳤다.

그리고 종종 성스러운 밤이면

대지가 진 숙명의 무거운 짐과 더불어

죽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대지를 성실히 사랑할 것과,

대지의 수수께끼 가운데 아무것도 무시하지 않을 것을 대지를 향해 맹세했다.

그리하여 나는 죽음의 끈으로 대지와 맺어졌다.

휠덜린, 엠페도클레스의 죽음


거미는 동이 트기를 기다리며 거미줄을 잇고

날줄을 끊을까 길 밖의 맨 흙을 밟아 발목까지 이른 이슬이 튀었다.


삶이 가장 어두웠던 시기

터널에서 벗어나기 위해 뛰었을 때


생의 수단을 끊고 무심히 지나가는 많은 부조리에도

묵묵히 같은 자리에 실을 잇는 거미를 보았다.


까닭 없는 불행에 개의치 않는 강인한 생의 의지를

여덟 개의 얇은 다리의 끝에서 볼 수 있었다.


나의 생조차도 나의 생애에 무관심하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세계는 나의 탄생과 그 끝에 관심이 없다.


인과와 권리가 존재하는 합리적인 세계, 사회는 합의된상상 속에 세워진 것이고 심지어 불완전하여

주장과 폭력에 너무나 쉽게 유린당한다.


그마저 이 미숙하고 이상적인 등대의 빛이 들지 않는 곳에 들어설 때, 또는 잠시 구름이 그 빛을 가릴 때

우리는 차가운 대지 위를 에우던 냉기와 태초부터 그 위를 딛고 있던 두 발이 새삼 낯설기만 하다.


까닭 없는 세계의 불합리함의 충격을 맞이했을 때

다시금 동의 없이 세상에 던져져 버린 갓난아기처럼 모든 것이 두려워질 때,

새벽 내내 조용히 다시 줄을 잇는 거미를 떠올리자


키에르케고르와 카뮈보다 더 일찍 세계에 대해 알려준 거미를, 열렬히 삶을 사랑하며 스스로 생의 의미를 부여하며 부조리에 반항하는 거미를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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