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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성일 May 21. 2021

달력이 왜 필요하지?

<미얀마 8요일력> 7화


달력을 탐구하는 동안 정작 달력이 왜 필요한지 생각해본 적은 잘 없었던 것 같다. 가장 오래된 문명 중의 하나인 '비옥한 초승달 지대' 수메르 문명에서도 날짜를 세는 법이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시간을 구분하는 방법은 인간의 삶에 매우 중요한 기술이었나 보다. 

문명이 시작된 때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도구가 등장하고 사라졌을 테지만, 달력이라는 도구가 이토록 오랫동안 인간 가까이에서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이유가 뭘까? 



싹을 틔우며


달력은 한 해 동안 자연의 때를 알려주는 도구이다. 농업으로 식량을 마련하던 고대 사회에는 계절을 잘 예측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씨앗을 뿌리는 시기와 거둘 시기를 알아야 더 많은 식량을 얻을 수 있기에, 계절이 바뀔 때를 미리 아는 것은 공동체의 번영과 연결되는 일이었다.


사람들은 순환하는 계절 속에 '새해'라는 중요한 이벤트를 부여해 지나간 삶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하는 축제를 연다. 세계 여러 지역의 새해를 생각해 보자.  

북반구 온대 기후 지역에서는 에 새해가 시작되는 지역이 많았다.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과 추분 중에서도 태양의 영향력이 커지는 춘분(春分, 3월 21일경)이 새해로 선택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춘분은 추운 겨울이 지나 새로운 생명이 싹트는 기운이 샘솟는 시기이기도 했다. 고대 바빌로니아(Babylonia) 문명과 히브리(Hebrew) 문명은 보리가 자라는 봄 니산월(Nisan, 3월 중순-4월 중순)을 새해로 정했다. 회귀 황도대(tropical zodiac)을 따르는 서양 점성학에서 춘분은 물고기자리(Pieces)에서 양자리(Aries)로 넘어가는 시기이기도 했다. 

태양력으로 달력을 세는 지역에서는 동지(冬至, 12월 21일경)를 새해로 정하기도 했다. 1년 중 태양의 길이가 가장 짧은 동지를 지나면 태양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에 중요한 날이었다.

태음태양력을 세는 동아시아에서는 대한과 소한 등 겨울 절기가 있는 달이 지나 입춘이 속한 달의 첫날을 새해로 정했다. 

북반구와 계절이 반대인 남반구는 어떨까? 마야력을 보면 새해는 7월 26일에 시작된다. 북반구에서 보면 한여름이지만, 남반구에서는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하는 계절이다. 


여러 지역을 살펴보니 새해는 봄과 함께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태양의 영향력이 줄어들었던 겨울을 지나 새로운 생명력에 대한 기대로 새해를 맞이하는 것이다. 


미얀마 새해(띤잔) 물 축제 (c) Theis Kofoed Hjorth



둠칫. 두둠칫.


달력은 흘러가는 삶의 시간에 리듬을 부여한다. 반복되는 일상에 축제나 휴일 등이 비집고 들어오면 새로운 흐름과 활력이 만들어진다. 그래서 같은 달력을 공유하는 공동체는 서로 삶의 리듬을 공유하고 맞춰 살아간다. 


계절에 따른 작물의 생산을 함께 하는 것에 더해 공동체는 종교적인 행사를 통해서도 삶의 리듬을 맞춘다. 어쩌면 종교 행사는 그 무엇보다 공동체의 삶의 방향성을 공유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농업을 기반으로 형성된 공동체에서 인간은 자신의 능력을 뛰어넘는 자연의 순환과 천체의 움직임을 늘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삶의 태도가 신의 뜻이라는 이름으로 달력에 새겨져 공동체에 전해진다. 


우리에게 익숙한 달력은 매일매일이 숫자로 기록된 형태이다. 그러나 과거에는 날을 정확한 숫자가 아닌 기호와 상징으로 표현했다. 이러한 달력은 달력(calendar)보다는 연감(almanac)이라는 단어에 더 가깝다. 연감에는 종교 축제 또는 농사 주기를 알 수 있는 기호와 더불어 행성의 움직임으로 미래를 점칠 수 있는 상징이 기록되기도 했다.  



한해 동안의 종교 축제와 농사 주기를 기호로 기록한 서양의 연감.



인도 라자스탄 지역의 힌두력 1871-1872년 연감. 왼쪽 세로줄은 비슈누의 10 화신을, 가운데 오른쪽 세로줄은 힌두 12 궁도를 나타낸다. 오른쪽 세로줄은 9 행성이다.


이처럼 한 공동체는 계절을 공유하고 수확한 식량을 함께 나누고 즐기면서, 때론 함께 믿는 종교의 행사를 통해 구성원끼리 연결되어 있음을 강하게 느낀다. 공동체의 삶의 모습이 고스란히 기록되는 도구가 바로 연감 또는 달력이다. 달력을 통해 과거에서 미래로, 어른에서 아이로 공동체의 삶이 이어진다. 



미얀마의 1년


공동체의 기록으로서 달력의 의미를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미얀마의 1년은 어떻게 흘러갈까? 전통 달력을 통해 미얀마 공동체가 함께 기억하는 삶의 발자취는 무엇일까?

미얀마 전통 달력에서 한 달은 삭망월을 기준으로 한다. 29일-30일 주기로 반복되는 열두 달에는 각기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여러 민족과 언어가 공존하는 다문화 사회 미얀마에서 국민 68%에 해당하는 버마족의 전통을 기준으로 달력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미얀마 국민의 다수를 차지하는 버마족의 1년. 맨 위 회색 부분은 서양력의 열두 달이다. (c) Noh Sungil


버마족의 달력을 보면 세계 여러 지역의 연감처럼 계절과 종교가 이들의 일상에 굉장히 가까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열대 몬순 기후인 미얀마의 계절은 크게 건기와 우기, 겨울로 나뉜다. 겨울이라도 우리가 떠올리는 추운 겨울이 아니라 여름보다 조금 선선한 정도이지만, 그 미묘한 차이 속에서 작물과 삶은 변화를 맞이한다. 

미얀마 국민의 89%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상좌부 불교를 믿기에, 불교 행사가 삶에 리듬을 부여하는 큰 역할을 한다. 성인식과 결혼 등 삶의 중요한 일이 불교 행사에 맞춰 결정되기도 한다.



달력이 왜 필요하지?


도시 문명에서 일상을 사는 현대인들에게는 자연의 변화가 일상에 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 더군다나 공동체의 연결이 약해져 공유하는 가치가 희미해진 것도 사실이다. 종교도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현대 사회의 일상은 이전과 전혀 다른 리듬으로 흘러간다. 1분 1초로 잘게 쪼개진 숫자를 따라가는 일상이 더 편리한 현대인에게 거대하고 추상적인 연감의 기호는 더 이상 의미가 없어졌는지 모르겠다.


일상에 달력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한 치 앞이 보이지 않는 코로나 시기를 겪으며 다시 한번 묻게 된다. 그리고 쿠데타를 겪고 있는 미얀마 사람들에게 달력이 필요한 이유는 무엇일까?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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