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 8요일력> 9화
미얀마 달력을 통해 '시간'이라는 개념을 탐구하고 있다. 작년부터 현재까지 인류는 코로나 19라는 유례없는 인류 공통의 큰 사건을 통과하고 있다. 오늘은 코로나 19 대유행이 시간 개념에 미친 영향을 생각해보려 한다.
세계 표준시가 등장하기까지 배경을 살펴보자. 서양에서도 중세까지는 지역마다, 도시마다 다른 새해 첫날을 셌다. 그러다가 영주가 통치하는 지역과 조그마한 공국들이 커다란 국가로 통합되면서 행정과 중앙 집권의 도구로 달력이 통일되었다.
제국주의 시기 유럽에서는 활발한 상업 활동과 무역 항로의 개척으로 삶의 반경이 마을과 영지를 훌쩍 뛰어넘어 수개월, 수년이 걸리는 거대한 이동이 가능해졌다. 이런 시기의 달력은 연속한 날들의 흐름, 즉 날짜가 적힌 형태가 먼 미래를 계획하기에 적합했다. 먼 거리에 있는 사람과 날짜를 약속해야 했던 이 시대의 달력은 계절과 농사를 그려 넣은 연감의 형태를 벗어났다. 넓은 지역의 다양한 문화와 언어, 기후들을 고려했을 때 통합된 달력 시스템에는 숫자가 보편성을 띄기에 적합했다. 그리하여 근대에 가까워질수록 달력은 숫자와 기호가 일정하게 배열된 모습으로 바뀌었다.
자연현상과 분리해 시간을 셀 수 있다.
"자연현상과 분리해 시간을 셀 수 있다"는 생각은 시간 개념에 엄청난 변화를 주는 생각이었다. 농사나 자연의 때가 아닌 다른 기준으로 삶을 예측하고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산에 의존하지 않아도 새로운 방식을 통해 오늘을 쓸 자원보다 훨씬 더 많은 자원이 축적되는 시대가 등장했다. 오늘을 살던 사람들이 먼 미래를 계획할 수 있게 되는 것은 놀라운 패러다임 전환이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그렇게 도래한 근대의 시간 감각을 잘 보여주는 것이 바로 '시계'이다. 과거에는 해와 달, 별의 움직임과 함께 축제가 부여하는 리듬 안에서 시간을 인식했다면, 시계가 대중에 보급된 이후로 일상은 자연과 분리되어 기계를 통해 인위적으로 분절되었다. 하늘을 보는 대신 손목을 들여다보며 시간과 분초 단위로 변하는 스케줄을 소화하는 시대가 왔다.
산업혁명 이후로 인류는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오늘을, 타인을 희생하며 살아왔다. 지금 겪는 고통과 인내의 시간은 언젠가 미래의 보상으로 돌아올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기에, 현대 사회를 사는 모두가 밤낮없이 달려왔다.
그러나 2020년 온 세상에 불어닥친 코로나 19 대유행은 미래에 맛볼 달콤함을 산산조각 내버렸다. 팬데믹은 생계와 생명을 직접적으로 위협했다. 미래는 고사하고 당장 내일이 존재할지 불확실해진 현실을 마주하며, '운명, 사주' 또는 '주식, 부동산' 등에 관심이 몰리기도 했다. 예측이 불가능한 미래가 주는 불안한 심리를 달래려는 시도였을까?
집 안에 갇혀 이전의 좋았던 삶으로 돌아가길 바라는 허무하고 답답한 기다림은 작년에 유행하던 “2020년을 통째로 없애고 싶다.”는 말에 잘 담겨 있다.
코로나 19가 1년 이상 지속되면서,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버티던 사람들도 이제는 서서히 힘을 빼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차단된 미래 앞에서 어렴풋하게 '지금'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나는 감금과도 같던 사회적 거리두기가 오히려 현재를 살아가게 했다고 믿는다. 무한 루프에 빠진 듯 반복되는 지루한 하루였지만, 미래를 향하던 시간이 이제는 나를 향해 흐르기 시작한다는 것을 깨달은 중요한 계기가 아니었을까? 무한한 줄 알았던 자원(시간, 공간)에 제약이 생긴다면 내 필요와 욕구는 어디로 향할까?
내게도 최근 그런 경험이 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로 수도권에서 카페 사용 시간이 한 시간으로 제한되던 시절이 있었다. 코로나 이전에는 카페에 몇 시간씩 앉아 작업을 했던 나에게는 충격적인 조치였다. 그러나 오랜 집콕에 지친 탓에 한 시간이라도 밖에서 숨을 돌릴 수 있어서 정말 소중했다. '한 시간밖에 못 머물다니... 한 시간을 어떻게 쓸까? 평소에 미뤄둔 독서? 사랑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 보며 대화하기?' 한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많았으나, 의미 없이 SNS 피드를 쓸어 넘기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매번 카페로 나서기 전이면 지금 나를 위해 가장 좋은 선택이 무엇 일지를 고민하게 되었다. 자유로웠던 시간과 공간에 제약이 생기자, 그제야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했다.
코로나 19처럼 언제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지 모르는 불안한 위기의 시기에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며 살게 될까? 14세기 유럽을 휩쓴 흑사병을 생각해본다. 기독교적 가치에 따라 인간보다 신을, 현세보다 내세를 더 중요하게 생각하던 중세 시기가 흑사병과 함께 끝나고, 인간과 현실의 아름다움을 꽃피우는 르네상스(Renaissance)가 도래했다.
미래의 성공을 위해 달리던 사람들이 일상의 소중함을 발견한 이 코로나 시기를 후세 사람들은 과연 어떻게 평가하게 될까?
인간은 자연의 흐름 안에서 몸으로 시간의 변화를 인식한다. 불어오는 바람과 살갗에 닿는 햇빛의 아주 미묘한 변화에도 계절이 바뀌고 있음을 알아챈다. 코로나 시기 일상이 절망적이고 지루한 이유는 계절의 변화와 삶의 리듬을 몸으로 직접 느낄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시간 감각은 삶의 방향 감각이기도 하다. 자연으로부터, 사람으로부터 고립되어 내가 어디에 서있는지, 어디쯤 왔는지, 얼마나 더 가야 하는지를 도무지 알 수 없고, 미래를 위해 적어두었던 다이어리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지는 경험을 했다. 코로나 이후로 사람들은 방향 감각을 상실해버렸다.
코로나 19는 현대인이 당연하다 여기고 누렸던 문명에 거품과 구멍이 많음을 느끼게 된 전 지구적 사건이다. 특별히 유럽과 미국의 코로나 19 뉴스는 근대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에게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견고하고 이상적이라 알고 있던 지배자의 세계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는 순간이었기 때문이다. 현대 사회를 이루는 대부분의 시스템과 사고방식을 만든 서양 세계의 민낯을 보니, 삶의 기반이 모조리 의미 없어지는 것 같았다.
최근까지 인류는 세계 표준시라는 거대한 시간선 아래에서 살아왔으나, 코로나 19로 공간과 시간의 제약이 생기면서 굳건하게 돌아가던 세계 표준시의 존재에도 의심이 생긴다. 과연 만나지 못하고 소통하지 못하는 사회끼리 같은 시간대를 살 필요가 있을까?
공동체의 달력은 속한 사람들끼리 기념일과 축제, 종교 행사 등을 공유하며 서로 삶의 리듬을 맞추게 한다. 그런데 코로나 시기, 사회적 거리두기로 공동체의 행사를 즐기지 못하고 만나지 못하는 상황에서 같은 달력을 쓰는 의미가 있을까? 공동체가 더 이상 삶의 리듬을 공유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의미는 현재까지 헤게모니를 쥐고 있던 종교와 문화가 희미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 전 세계가 코로나 19만큼 커다란 공통의 경험을 겪었던 적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분명 모든 달력에 중요하게 새겨졌을 것이다. 그나마 현대 사회가 표준으로 삼는 그레고리력의 기원년인 예수의 탄생은 그레고리력의 보편화 이후 인류 역사에서 특별한 기준이 된 사건이다. 그런데 우리가 지금 살아가는 이 코로나 19는 유일무이하게 인류 공통의 기억을 차지하는 사건이다. 2020년을 새로운 달력의 기원년 AC(After Corona)라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사회 문화가 새로운 질서로 바뀌는 격변의 시기, 더 이상은 코로나 19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도시의 밤, 환한 불빛은 별을 가린다. 별이 보이지 않는 도시에서는 천체의 궤적에 자신을 비춰볼 수 없다. 내가 발 디딘 일상을 벗어나야 비로소 가능한 별 보기. 얼마나 특별한 일인가. 어둠을 화려하게 밝히는 빛이 사라져야 드디어 빛이 보이는 아이러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문명의 빛이 밤하늘을 밝히지만, 더욱 깊어진 어둠에 한 치 앞도 보지 못하는 시대.
삶의 터를 빼앗긴 자영업자, 일상을 살지 못하게 된 사람들. 미래 예측이 무너진 인류. 방향을 상실한 사람들은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떤 기준을 믿고 살아야 할까? 삶의 구원은 어디에서 올까? 코로나 19가 우리에게 던져준 질문은 새로운 시대의 철학, 종교, 가치관의 등장을 예고한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