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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복실 May 12. 2020

3장. 그러게나 말이다

신랑 변호사 만들기 프로젝트


알고 있다.

나는 굉장히 욕심이 많다는 걸.

그런데 욕심이 많다는 얘기는 그만큼

내 인생에 열정을 가지고 살고 있다는 점이다.


친구들이 한 번은 나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

“소진아, 너는 우리 중에 직장도 제일 좋고,

일도 잘해서 인정받는데 뭐가 또 하고 싶어서

회사에서 기자단도 하고 뭣도 하고 열심히 사는 거야? 대기업 취직했으면 좀 쉬어~

잘릴 일은 없잖아 은행은”


그러게나 말이다.

왜 이렇게 열심히 하려고 하지?

성격인가?라는 대답으로 말을 흐렸다.


집에 와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나는 유학시절 나의 한계를 온몸으로 느껴서 그런지 남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며 미친 듯이 살았다.


대학교 2학년에 훌쩍 떠나 미국에서의 3년 생활은 나의 암흑기이자, 내 성장기이기도 하다.

유학 가기 전의 나는 밥 한번 지어본 적 없는 귀하디 귀한 막내딸이었다.

천방지축이어서 몸에 흉터도 많아 엄마 속을 꽤나 썩였다.
그런 나에게 혼자 온전히 살아가야 하는 미국에서, 음식이며 학업이며 모든 것은 나의 ‘책임’이 따랐다.

남들처럼 여유롭게 유학생활을 할 수가 없었던 나는 용돈을 벌기 위해 교내 파트타임으로 유학생이 최대 일할 수 있는 주 12시간을 꼬박 채워 용돈벌이를 했다.


막내딸이어서 연세가 있는 아빠에게 비싼 학비를 받아 쓰는 것이 못내 죄송스러워 내가 할 수 있는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으려 애썼다.
그 현실적인 해결책을 난 다음과 같이 내렸다.
1.  학점 잘 받기
2.  학점이수 많이 해서 빨리 졸업하기
3.  장학금 받기
4.  장학금 받아 대학원 진학하기
마지막 4번을 제외하고 나는 모든 걸 이뤄냈다.
 
정말 비참하고도 영광스러운 유학시절이었다.
 
18학점 (6과목)을 들으며, 연구조교(Research Assistant), 무급인턴 2곳 (National Kidney Association/ Ronald McDonald Charity House), 교내 알바를 하며 4학년 1학기를 보냈다.


진짜 죽고 싶을 만큼 힘들었다.


특히 무급인턴을 하는 곳 중 한 곳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에서 30분 떨어진 다른 도시에 위치했으며,

나는 차가 없어서 대중교통을 이용해야 했다.

미국의 대중교통은 한국과 달라서 30분에 1대씩 있는 버스를 타고 종점에서 내려서 고속도로 갓길을

15분 걸어야 회사가 나왔다.


눈이 오는 날, 쌩쌩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보내는 매서운 바람을 맞으면서 갓길을 걸어 회사에 도착하고 눈을 툴툴 털다가 갑자기 눈물이 쏟아진 적도 있었다.

엘리베이터에 비친 22살의 나는..

무섭도록 비참해 보였다.
억척스러운 동양인 여자. 그게 22살의 나였다.


그런데 그 억척스러움과 비참함과 눈물들은 나에게
어마어마한 찬사와 대단한 성적표로 보답해왔다.
 
모든 과목 A+에, 학과장님 추천으로 장학금을 받아냈으며, 대학원에 갈 수 있는 추천서를 3명의 교수에게 받을 수 있었다.
 
“어느 대학원에 지원할 거니?” 라며 묻는 학과장님에게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


“하버드, 스탠퍼드, 콜롬비아. 이렇게 3개만 넣을 거예요. 지원할 돈도 없고, 다른 곳에 넣어서 합격해도 안 갈 거거든요.”
건방지기 짝이 없던 당찬 여자였다. 나는.


학과장의 눈동자는 심하게 흔들리고 솔직 담백한 전형적인 미국 할아버지 스타일의 학과장님은

 “행운을 빌어! 힘들겠지만.. 괜찮을까?”


학과장님의 걱정을 뒤로하고 나는 무작정 대학원 원서에 집중했다. 나의 자신감은 하늘 높이 상승해 있었고, 안 되는 건 없다는 걸 나 스스로가 증명해 보이고 있었다.


학점을 잘 받기 위해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몇 배의 시간을 들여 책을 읽고 외웠다.

영어가 부족한 나에게 300페이지, 400페이지에 달하는 원서는 눈물이 날 정도로 벅찼다.


평소에는 렌즈를 끼는 나는, 공부를 시작하면 돌돌이 안경을 착용하고, 앞머리를 질끈 뒤로 넘겨 못생김을 극대화시켰다. 도서관에서 아무도 나를 알아보지 못하도록.
도서관 구석자리에서 혼자 공부했다.

책가방 안에는 집에서 싸온 피넛버터 샌드위치 3개를 넣어가지고 다니면서 배고플 때마다 먹었다.


시험기간이 오면 도서관에 자리가 없고, 아는 얼굴들이 많아져 아파트 한편에 마련된 자유공간 (인적이 드물고, 아파트 입고과 근접하여 24시간 매니저가 앉아있다)에서 밤을 새우며 공부했다.
밤을 새우며 맡는 새벽 공기가 너무 좋았다.
그 새벽 공기는 나에게 행운을 불어넣어 줬다.


원서를 냈던 3곳 중 1곳에서 합격통보를 해왔다.
너무 기뻤으며, 온 가족들의 반가움과 대견함이 타지에서 까지도 절실히 느껴졌다.
기적과도 같았다. 아이비리그 라니!

내 절친은 나를 ‘아이비리거’라고 불렀다.


합격한 대학원이 있는 뉴욕을 방문하고 싶었다.
 
마침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와, 토플학원을 같이 다니며 친해진 아는 오빠, 한국 대학교에서 같이 독일어를 공부했던 친구까지 모두 동부에서 지내고 있어 필히 동부를 가고 싶었다.


그러기엔 비행기 값이며, 숙박비가 없어서 고민하던 찰나에 좋은 글을 보게 되었다.


[신입사원 모집공고]
“유학생 대상 국민카드 마케팅 신입사원 모집”
1차 서류전형 합격 후 2차 면접에는 면접비가 제공됩니다.
면접은 뉴욕, 시카고, LA 3곳에서 진행될 예정



2차 면접비는 비행기 값 (200달러)를 준다고 했다.
나는 1차 서류전형에 지원했다. 처음 써보는 ‘한국형’ 자기소개였다. 아주 솔직하게 나의 장담점과 KB에 대한 생각을 적어내려 갔다.
그리고 얼마 후, 1차 서류전형 합격소식이 전해졌고
나는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 티켓을 최저가에 예약했다. 다행히도 뉴욕 살고 있는 중학교 때 친구 집에서 머물 기로 해서 숙박비는 들지 않았다.


처음 보는 면접이라 떨릴 법도 한데, 나는 그냥 설레었다. KB에 입사할 생각보다, 뉴욕에 갈 생각에 심장이 요동쳤다.


뉴욕의 첫인상은 굉장히 복잡하다, 시끄럽다, 건물이 높다. 이 세 가지였다. 그리고 뉴욕 지하철은 상상 이상으로 더러웠다. 친구 집에 머물면서 뉴욕의 유명한 컵케익 집, 공원을 돌아다니며 면접 준비스럽지 않은 면접을 맞이했다.
 
면접 당일, 화장을 잘하지 않는 나였기에 친구에게 화장을 부탁했다.

친구는 중학교 이후 미국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나에게 예쁜 미국식 메이크업을 해주었다.

그건 다름 아닌 스모키 화장법(그 당시에 굉장히 인기가 많았다)


그렇게 친구가 그려준 스모키 화장을 하고

어제 H&M에서 산 정장세트를 입고 면접장으로 향했다. 처음 보는 면접이었고, 면접관님들이 생각보다 따뜻하게 대해주어서였는지 몰라도, 나는 옆집 아저씨에게 얘기하듯 ‘-했어요’체를 썼다.


쏟아지는 질문 중 내가 모르는 시사문제가 나왔고, 나는 너무나 태연하게 “죄송해요. 제가 미국 와서는 신문을 보지 않아서 그리스 사태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라고 대답했다. 창피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것저것 대답했지만 딱히 인상적으로 대답한 나의 답변도 없었고, 면접관님들의 표정도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는 웃었다. 생애 처음 면접을 본 나 스스로가 대견해서.


면접날은 세인트 패트릭 데이였다. 면접 끝나고 친구와 만나기로 했는데 퍼레이드 준비로 시내 곳곳을 통제해놔서 친구와의 만남이 늦어졌다.
면접 어땠냐는 친구의 물음에 “그냥저냥~ 그리스 사태가 뭐야? 너 알아??” 친구도 모른다기에 그리스 사태 따위 하며 넘겼다.
 
그렇게 나의 생애 첫 면접은 끝이 났고 미네소타로 돌아와서 나의 면접 후기를 묻는 질문에
“나 질문에 대답도 못하고 그냥 웃었어.... 시사상식 물어보니까 그거 준비해” 라며 시큰둥하게 반응했다.
안 붙으면 대학원 가면 되니까~라는 자신만만한 생각으로.
 
뉴욕 면접 다음이 시카고 면접이어서 같은 학교 언니들, 친구들은 시카고 면접을 준비하고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좋다고 생각하며 나의 면접 담을 가감 없이 풀어놓았다.
같은 학교 언니들의 눈빛에서 희망을 보았다.
‘아.. 경쟁상대 한 명은 제쳤구나, 소진이는 탈락이네’
 
발표가 언제 나는지도 몰랐다. 그만큼 면접에 대한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시카고에서 면접을 보고 온 언니한테서 새벽 4시에 전화가 왔다. 엉엉 울면서 자기는 KB 떨어졌다며 울고 있었다.
나는 알겠다고 나도 확인해보고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내 컴퓨터의 모니터에서는 ‘합격을 축하합니다’라는 문구가 보였다.


한참을 망설였다. 혼란스러웠다.
왜 나에게 이런 기쁨을 주실까? 그간 고생했던 나에게 주는 축복인 건가?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가족은 축제 분위기였다.
막내딸의 승승장구. 아이비리그 대학원 합격, 한국의 1 금융권 최종 합격.

이보다 더 좋은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난 행복한 고민 속에서 일생일대의 결정을 내려야 했다.

뉴욕행이냐 서울행이냐. 대학원이냐 회사냐.
나의 결정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빠가 쓰러지셨었어.. 너한테는 말 안 했지만 췌장이 안 좋으셔 조직검사도 받았어. 암일지도 모른데.”
걱정할까 봐 미국에 있는 딸에게는 숨겼던

아빠의 지병.


졸업식에 엄마 아빠는 참석하지 못하셨다.

아쉬웠다. 나는 최고 성적우수자들이 받는 금줄도 받았는데..


나에게 최고의 기쁨과 절망감을 안겨주었던

나의 유학생활을 그렇게 끝마치고 난 금의환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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