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환학생 작문일지 -9-

나는 내가 편견 없는 사람인 줄 알았다

by MSJ

62일 차


일어났는데 복통이 심해서 진지하게 현장체험학습을 갈지 말지 고민했다. 오늘은 산이 아니라 해안이니 그냥 갈 생각으로 일어났다. 스파게티를 먹을 때까지만 해도 너무 심했는데, 화장실에 다녀오니 조금 나아졌다. 정말 마지막까지 고민하다가 겨우 출발했다.

오늘의 장소는 센토사 해변이었다. 한 현지 친구가 나한테 뜬금없이 그림을 잘 그리냐고 물어봐서 어느 정도라고 말하고 그린 그림을 보여주었다.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는 것 같았고, 내 그림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해안은 돌로 이루어진 곳, 고인 물이 많고 모래 위주로 된 곳, 두 장소가 적당히 섞인 곳, 갯벌과 비슷하지만 좀 덜 깊은 진흙지대(이런 곳을 mud flat이라고 부른다고 한다.)가 있었다. 한국의 해안과는 확실히 동떨어진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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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사진의 동그란 모양이 산호다. 최소 몇십 년은 된 거라고.


산호가 이 정도로 널려 있을 줄은 몰랐는데, 사체로 남은 거대한 산호부터 아쿠아리움에서나 봤었던 작고 예쁜 산호들까지 있었다. 꽤 바깥쪽으로 갈수록 산호보다 해초가 좀 더 우점적이었고, 돌에 생물들이 많이 몰려있었는데 돌 밑에는 산호가 많았는데도 해초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6시 20분에 한 달에 한 번 있는 low tide가 온대서 왔던 건데, 확실히 그 시간에는 넓은 해변지대를 볼 수 있었다.

서양인 교환학생들은 해변에서 좀 놀다 온다했고, 나는 현지인 학생들과 홍콩 학생, 중국인 학생과 함께 버스를 기다렸는데, 버스가 꽤 늦게 왔다. 그동안 편의점에서 오렌지 맛 슬러시를 사 먹었다. 버스에서 내린 뒤 신발도 젖고 찝찝해서 들어가려는데, 현지인 학생들이 혹시 같이 저녁 먹으러 가지 않겠냐고 물어 같이 갔다.

내가 텐션이 낮은 편이라 적극적으로 대화에 참여하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활달하고 붙임성 있는 현지인 학생들을 보는 게 좋았다. 대학 동기들을 떠올리게 만든달까. 한국이 그리운 이유 중 가장 큰 게 사람들이다. 나는 학창시절에 몇몇 사건을 보며 인간불신에 빠질 뻔한 적이 있었는데, 그런 나를 잡아준 사람들 중 하나가 대학 동기들이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갖고 나면 그 사람에게 내가 나빠 보일까 걱정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이후로는 특히. 하지만 대학 동기들에게는 그런 생각보다는 내가 그 사람들에게 내가 그들을 생각하는 것만큼 좋게 생각한다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한국에 가고 싶어지는 하루가 됐다.

먹었던 저녁은 후타마?라고 불렸던, 중앙에는 다양한 고기를 구워 먹고 주변에는 약간 라임향이 나는 육수에 면이나 채소를 넣어 먹는 요리였는데, 꽤 취향이었지만 같이 먹으면 배려한답시고 조금씩 먹는 나라 그렇게 많이 먹지는 않았다. 오레오 아이스크림을 사먹었는데, 부드러운 크림을 먹는 느낌에 좀 더 가까웠다. 학생들끼리 돈을 정산하던 도중 홍콩 출신 친구가 거스름돈 대신 밥을 사주겠다고 해서 그러겠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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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오는 길에는 육교 위에 올라 중국 노래를 부르는 걸 들으며 야경을 즐겼다. 오늘이 가장 파도차가 심한 날이어서 그런지 선명한 보름달이 하늘 위에 떠 있었다. 달의 그림자가 토끼인지, 거북이인지 선명하지 않았다. 둘 다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다만 달빛도 가로등도 모두 밝아서 차들이 달리는 도로가 선명히 보였다는 것이 기억난다.


63일 차

거의 아무것도 안한 날. 다만 현장체험 학습 레포트를 좀 정리해두기는 했다. 근처 식당에서 카레 돈까스를 시켜 먹었는데, 너무 더워서 땀이 많이 나는 바람에 금방 나와 부스트라는 스무디 가게에서 바나나 버즈를 사 마셨다. 저녁은 캔틴 2에서 파인애플 볶음밥에 치킨을 추가해 먹었는데, 너무 짜서 다시 먹을 생각은 없을 것 같다.


64일 차


오늘은 수채화 수업에서 야간 풍경을 그리는 날이라 6시 반에 수업이 시작했다.

팔레트도, 종이도 어두워서 잘 안 보이는 바람에 중간부터는 핸드폰 손전등 기능을 킨 채로 그림을 그렸다. 빛을 쓸 때 흰색을 다른 색이랑 섞어서 쓰고, 빛의 세기를 공간마다 다르게 표현해보라는 조언을 얻었는데 이건 솔직히 억울하다. 내건 이상하게 흰색만 써야 색이 밝게 나온다. 물감이 이상한 건가 붓이 이상한 건가. 솔직히 많이 억울하다. 장인은 도구 탓을 안 한댔는데 애초에 나는 탓할 실력이다. 그래도 밤에 불을 비추며 그리는건 솔직히 낭만있었다.

그동안 그렸던 그림을 제출하려고 전부 챙겼었는데, 처음에는 어두운 톤이었던 그림이 나중에는 깔끔하고 밝은 그림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며 뿌듯하고 즐거운 마음이 들었다.

KakaoTalk_20211015_102010435_02.jpg 모작 수업 때 원래 그림의 일부를 따라 그렸다. 예전과 비교하면 다양하게 색깔을 쓰게 된다.


65일 차


점심에 먹은 쌀국수는 생각보다 고수 향이 강해서 다음에 먹겠다는 생각은 버렸다. 습관적으로 또 맥도날드를 먹었는데, 나름 죄책감을 회피하려고 사이다 대신 라떼를 마시기는 했지만 오히려 기분만 별로가 될 뿐이었다.

RNA 수업을 들을 때면 자신감이 떨어져 가는 기분이다. 특히 발표를 들으면 더더욱. 그래도 여기 아이들은 생각보다 배려심이 많은 것 같다고 느낀다. 처음에는 교환학생을 배척하는 분위기가 경영학과에 존재한대서 여기도 그러나 조금 무서웠는데, 그냥 서로서로 경계하다보니 쌓인 오해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이몇 년을 지내온 동기와 새로운 교환학생은 다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으니까. 내가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해외에서 온 교환학생과 어울린 적은 한 번도 없었는데, 교환학생이 수업을 어려워할 때 챙겨준다는 것 자체가 솔직히 고마웠다.

저녁에 어머니와 통화를 했다. 저번에 숭늉이 먹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누룽지컵을 포함해 간식을 좀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66일 차


아침 10시 반쯤 샤워를 한 뒤 청소를 바로 시작했다. 빨래까지 처리하고 나니 2시가 넘어있었다. 일어났는데 문 앞 중성세제가 엎어져 있어서 청소하는 시간 중 30분은 그거 치우는데 쓰는 것 같다. 배운 점은 비누 엎으면 절대 물로 치우면 안 된다는 거. 거품이 장난 없다

간단히 식빵과 잼을 먹고 주롱 포인트에서 돈을 좀 뽑은 다음에 택배를 찾으러 갔다. 한달 전에 보낸 택배를 지금 받을 줄이야. 지도와 위치가 조금 달라서 헤매긴 했는데, singpost라고 다시 검색해서 찾으니 잘 나왔다. 택배를 받는데 생각보다 택배가 (이미 어느 정도 크다고 듣긴 했지만)많이 커서 직원분이 당황 섞인 웃음과 함께 택배상자를 건네줄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도 어떻게 그걸 들고 버스까지 타고 왔는지 미스테리다.

보통 사람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는데, 나는 오늘 내 상자를 본 뒤 나와 눈을 마주친 분만 n명은 본 것 같다. 그렇게 약간의 쪽팔림과 주목을 받고 기숙사에 들어가서 상자를 풀어보자 한 달 가까이 보지 못했다는게 아까울 정도로 정말 내 취향 위주의 과자와 음료가 있었다. 이번에 오는 것까지 하면 귀국 때까지 간식은 사지 않아도 될 정도의 수준이었다.

홈런볼이 5개나 와서 하나는 옆방의 인도 친구에게 주었다. 조금 나눠 먹다가 이따 맥도날드에서 같이 저녁을 먹기로 했다. 원래는 노스 스파인에서 공부하다가 캔틴2에서 마라샹궈를 먹을 계획이었는데, 이건 일요일로 미뤄야겠다. 마침 일요일에 뭘 먹을지 고민 중이었으니까. 오는 길에 어제 수업에 안 왔던 한국인 분과 얼굴만 아는 다른 한국인 분들을 뵈었는데, 그냥 인사를 안 하는게 나을 것 같아서 지나쳤다. 괜히 아는 척 하면 수업 이야기가 자연스레 나올까봐 그랬다.

저번에 필드트립 후 나랑 같이 있던 룸메가 다른 곳으로 방을 옮겼다는 얘기를 하니까 현지 학생들이 혹시 백인이냐며 물은 적이 있었다. 그렇다고 하니 그럼 옮길 만 하다고 납득을 했었는데, 이걸 보면 아무리 같은 반이나 과라도 어쩔 수 없이 같은 인종끼리 뭉치게 되는 경향이 생기는 것 같다.

언어의 유사성. 문화의 공감 정도. 외모의 괴리감. 단순히 우열을 가리는 차별과는 달리, 낯선 상황에서 최소한의 동질감을 찾고 싶다는 느낌에 좀 더 가까웠기에 솔직히 그 말을 듣고 기분이 썩 좋진 않았지만 밉다는 생각도 안들었다. 갑작스레 1인실을 쓰게 되어서 처음에는 오히려 기뻤으니까.

원래는 오늘도 부스트 음료를 마실까 생각했었는데, 그냥 저녁을 먹고 간식을 조금 먹으며 넷플릭스나 볼까 생각 중이다.


66일 차 저녁 6시


...사람은 말을 아니 글을 함부로 하면 안 된다는 걸 깨달은 하루였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는 영화가 있다. 그리고 난 지금 그 영화의 안티테제 주인공이 된 기분이다. 방금까지만 해도 다른 인종 친구들과 자연스레 어울리기는 힘들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맥도날드 대신 친구들과 같이 인도음식을 먹으러 가자는 옆방 인도 친구를 따라 갔더니 처음에는 다섯이었던 다인종의 친구가 아홉, 더 늘어서 어느새 열 몇 명이 뭉쳐있는 형태가 됐다.

멀리서 볼 때는 외국인학생들이 식당이 울릴 정도로 떠드는 경우가 많아서 한국이랑은 많이 다르구나 생각했는데, 막상 같이 있어보니 그냥 평범한 대학생 그 자체였다.

밥을 먹고는 보드게임을 했다. 시크릿 히틀러라는, 한국에서도 했던 게임을 그 친구들과 또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사실 유럽인들도 있는데 나치가 들어가는 게임을 해도 되나 잠깐 생각했지만, 당사자들도 아무렇지 않다는데 내가 뭐 어쩌겠는가.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과 게임을 하는 게 어떤 여행에서 얻은 경험보다도 새로웠다. 처음 만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말을 잘 못 트는 성격인데도 먼저 많이 말을 걸어주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부담스럽지 않게 대화할 수 있게 됐다. 내 이름을 최대한 잘 발음하려고 노력해주고, 처음 만나는 사이에는 인사를 하며 이름을 교환하고.

캔틴 9가 인도음식으로 유명하다는 걸 처음 알았는데, 버터 난 2개와 치킨 커리를 시켜보니 맛있었다. 옆방 친구도 내 커리를 좀 먹어보더니 동의했다. 한국에 인도음식점이 많다고 했더니 놀랍다는 표정이었다. 그런데도 한국보다 여기가 좀 더 맛있었다.

옆방 친구와 같이 돌아오면서, 저번에 만났을 때 내가 말을 별로 안 해서 같이 놀기 싫어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그게 내 성격이라는 얘기와 그 외에도 다양한 이야기를 하면서 걸어왔다. 자정이 다 된 시각이었는데 옆방 또 다른 친구가 문을 열어놓은 상태여서 간식거리를 좀 가지고 와 수다를 떨었다. 외국인들에게는 홈런볼이 정말 입맛에 맞는 듯 보였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캐나다 학생들이 강제 송환된다는 이야기. WHO가 개는 바이러스를 옮길 수 없다고 말한 것 때문에 WHO let the dogs out이라는 문장이 의문문이 아니라 평서문이 되었다는 농담. 정말 심각한 듯 심각하지 않은 이야기를 하면서 하루를 마무리했다.

교환학생을 오기 전에 내가 인종 및 국적 차별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묻느냐면 하지 말아야 할 일. 그게 전부일 것이다. 그런데 이곳에 와서 당연히 힘들 수밖에 없는 사소한 일들을 인종과 국적에 연관시키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어느 순간 합리화하고 있었던 것 같다. 가까이에서 현실을 마주하는 순간 깨져버릴 합리화를. 얘들은 그냥 대학생이다. 경험한 뒤의 그 문장은 그 전에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을 준다. 둥근 점토를 이리저리 누르고 뭉친 뒤의 점토는 둥글지만 그 강도가 다르다. 딱 그런 느낌이다.

내일은 자유롭게 음악실에서 각자 악기 연주나 노래를 한다는데, 어떤 분위기일지 상상이 안 간다.


67일 차


일요일 이른 시간에 일어난 건 간만인 것 같다. 샤워와 준비를 마치고 옆방 친구와 함께 캔틴 2에 갔다. 어제 얘기나 오늘 얘기를 종합해보니 옆방 친구가 다른 애들에게 내 자랑을 꽤 했던 것 같다. 또 다른 옆방 친구는 조국으로 강제송환된다고 한다. 영국, 미국, 노르웨이 등 다양한 나라가 귀국을 권고해 그런 것 같다.

드럼도 있다는 hall 15의 음악실이 잠겨 피아노라도 있는 hall 6에 가서 놀았다. 한 유럽인 친구는 잠시 자신의 기숙사에 들러 기타를 가져왔다. 고음 노래도 부르고, 알던 팝송, 이름만 들었던 팝송, 잘 모르는 팝송도 다 같이 부르며 3시간 가까이 노래를 불렀던 것 같다. 옆방 친구가 나중에 꼭 노래방 가자고 할 정도로 실컷 불렀다.

맞다, 뮤직룸에 가기 전 점심을 캔틴 2의 미니웍 코너에서 먹었다. 시그니처 메뉴를 먹었는데, 양이 적어서 좀 남기긴 했지만 맛있었다. 게다가 가까이서 보니 한식이나 일식 코너도 메뉴가 꽤 많았다. 얼굴만 아는 한국인을 몇몇 또 봤는데, 그냥 지나치거나 눈 마주쳐도 인사 안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래 애매하게 아는 사람이 제일 뻘쭘하다더니 딱 그거다. 근데 정말 신기한 건 외국인 친구들을 만나면 그런 느낌을 별로 못느낀다는 것. 그냥 원래의 인간관계에 관련된 신념에 소속되지 않는 사람들을 만나는 기분이다.

뮤직룸에서 혼자 3시쯤 나와 과제를 좀 하다가 맥도날드에서 저녁을 먹고 방으로 들어와 좀 놀았다. 그리고는 이어서 과제를 좀 더 했다. 내일은 또 부킷티마를 가야하니 일찍 잠에 들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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