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환학생 작문일지 -8-

특별한 이야기 없이 보냈던 나날들.

by MSJ

50일 차


아침에 일어나보니 목이 잠겨 있었다. 곧바로 학교 보건소로 향했다. 아침 일찍 가니 줄이 별로 없어 한 시간 만에 모든 진료를 끝냈다. 증상을 보니 코로나는 아닐 거라는 말에 안심했다.

11달러 정도 나왔는데, 예상보다는 낮게 나와 다행이라 여겼다. 약이 꽤 독한지 하루 종일 졸음이 쏟아졌다.

마스크를 주기로 한 C가 마스크를 깜빡해 밥만 먹고 헤어졌다. 예전에 tropical ecology 수업이 끝나고 갔던 타마린드 홀 캔틴에서 밥을 먹었는데, 약 때문에 혀가 약간 마취된 느낌이었는데도 맛있다고 느낀 걸 보면 정말 맛집이었다.

KakaoTalk_20211010_105757434.jpg 타마린트 홀 캔틴의 사진. 오른쪽에 푸드코트가 세워져 있고, 가운데에 카페가 있다.


내일도 약을 제대로 먹으려면 어느 정도 아침에는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1일 차


어제는 병결 인정이 돼서 수채화 수업 전 진지하게 수채화를 쨀까 고민했는데,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수업이니 그냥 듣기로 했다.

조금 일찍 일어나서 방에서 남은 인강을 들은 후 수채화 수업이 끝나고 마라샹궈와 땅콩버터 와플을 먹었다.

수채화 수업에서 색을 바꿔 그리는 걸 했는데 색 선정을 잘못했는지 좀 붕 떠 보여서 새로 그려볼까 고민 중이다. 여행 다녀와서 혼자서 그려봐야지.

아, 그리고 탄종파가 거리에서 떠올랐던 내용을 소설로 정리한 하루기도 했다.


“이렇게 익숙한 거리를 걷다 보면,”

한국에만 있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비행기를 타지 않았는데도 멀쩡히 하나둘씩 있는 거리는 익숙하기보다는 낯설었다. 한나는 한국어로 적힌 간판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한국에 두고 온 걱정들이 되살아날까 봐 걱정했어.”

실제로 처음 이 거리를 왔을 땐 그랬으니까. 어딘가 모를 익숙한 분위기가 떠올리기 싫은 기억들을 억지로 주입하는 느낌이었다. 도망치듯 선택한 비슷한 길. 분명 좋아하지만 정말 진심으로 이 일을 원하는 건지 명확히 들지 않는 확신.

“걱정했다는 건 지금은 안 그렇다는 거야?”

그 걱정이 이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자각한 것만으로도 녹아내린다. 손을 잡고 있으면 온기가 몸 전부를 채우는 느낌이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면 그는 무척 쑥스러워하겠지, 하고 그녀는 생각했다.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한나는 산을 향한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그 말에 대답했다.

“네가 옆에 있어서 괜찮은 것 같아.”

역시나 귀부터 천천히 산의 얼굴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어느새 말을 내뱉은 장본인인 한나의 뺨도 살짝 열기가 올라 있었다.

"다음에 올 때도 옆에 있을 거야."
"응?"
"네가 이 거리에 다시 올 때, 그때도 내가 곁에 있을게."

무언가를 이겨낸다면, 그녀는 실패해도 기댈 수 있는 이 사람이 곁에 있을 지금이 기회라 생각했다.



52일 차


채은이한테 드디어 마스크를 받았다. 좋은 소식은 이거고, 문제는 택배가 중앙우체국에 갔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그런데도 왜인지 모르게 그러려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외에서는 어떤 안 좋은 일이든 생길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인가. 그래. 진짜 2020년대의 시작은 2021년이다. 코로나는 액땜이라고 생각하자. (지금 생각해보면 어이 없는 생각이었다.)

며칠 후에는 리세스 위크가 있다. 그때는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갈까 생각 중이다. 인구 밀도도 낮고, 이동 거리도 그리 길지 않아 이 시국에 여행을 간다면 그곳이 적절할 것 같았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리세스 위크(사실상 공부 더 하라고 주는 방학인데, 교환학생들에게는 쉬는 때나 마찬가지이다.)가 몇 주만 늦었어도 말레이시아는 절대 못 갔을 것이다.)



53일 차


교환학생의 반이 지나갔다는 게 실감이 나는 2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내일은 지우 언니와 캔틴 2에서 만나 여행 회의를 하기로 했다.

토요일 아침마다 빨래를 할 때 느끼는 건데, 초반에 사온 저 세제를 다 쓸 수 있을지가 고민이다.

주롱이스트의 고기뷔페를 갔는데, 고기 뷔페인 오빠 BBQ가 있는 층에 아이스 링크와 노래방, 리호 티 등 다양한 시설이 있어서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었다. 다음에도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리호 티 음료에 딸기폼을 추가해서 먹었더니 그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당분간은 공부나 소설 집필을 좀 쉬어야할 것 같다. 건강이 완전히 회복되면 그 때 시작하는게 맞는 것 같아서.


54일 차


리세스 위크라 기숙사에서 청소를 안해서 그런가, 세면대에 우글거리는 개미를 보고 까무러칠 뻔했다.

여행 전날 점심 J 언니를 만나 전반적인 여행 계획을 세웠다. 앞으로 여행 동안의 기록은 휴대폰 메모와 다이어리에 적어둘 계획이다.

갑자기 예전의 일이 떠올랐는데, 감기 때문에 얼그레이 티백을 사온 날 프랑스 친구에게 티백 2개를 나눠줬었다. 그때 ‘I am not a tea person’이라고 말했었는데, 그럼 프랑스는 어떤 음료가 주로 마시는 음료일까. 아무래도 한국처럼 커피일려나.

편의점에서 파는 팟타이와 요뽀끼 브랜드의 치즈떡볶이를 먹었는데, 생각보다 퀄리티가 좋아서 다음에도 먹을 생각이다. 다만 요뽀끼는 조리 직후에는 조금 많이 뜨겁더라.


*55일 차~59일 차는 리세스 위크라 휴교를 했었고, 교환학생들은 거의 여행 때문에 자리를 비웠다. 사람이 거의 없는 기숙사에 있는 게 불안해서 기분 전환 겸 J 언니와 말레이시아로 여행을 갔다. (말레이시아의 조호르바루는 버스로도 움직일 수 있다.)

이때의 이야기는 외전으로 따로 정리할 생각이다.


60일 차


건조 기능이 되지 않는 세탁기와 하루 종일 비가 올 듯 말 듯한 날씨 때문에 빨래에 시달린 하루였다.

3일 연속 맥도날드가 당겨서 먹었는데, 좀 오바였나 싶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오랜만에 봐도 마음이 흔들리는 감동이 있었다. 중고등학교 시절 선생님이 틀어주는 앞부분만 보다 보니, 후반부는 제대로 본 적이 없어서인지 더더욱. 하쿠와 치히로가 조우하고 이야기하는 장면 하나하나가 소중하게 느껴지고, 신스틸러였던 새와 쥐가 나올 때마다 귀여운 마음에 무릎을 내리쳤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가 당기는 날이었다.


61일 차


오늘의 탐사는 부킷 티마 자연 공원이었다. 지도 그리며 필기하는 학생으로 눈도장을 찍었는지 교수님이 간간이 말을 거셨다. 다른 학생도 지도를 보여달라고 할 정도로 말을 계속 걸어주는 걸 보면 이전에 비해서는 친해진 건가 생각이 들었다.

KakaoTalk_20211010_105757434_02.jpg
KakaoTalk_20211010_105757434_01.jpg
부킷티마 자연공원을 자주 갔는데도 사진을 별로 못 올린 것 같아서 올리는 나무 사진과, 입구를 지키는 원숭이를 찍었다.


아직 현지 여자애들은 여자애들끼리 몰려다니는 경우가 많아 같은 교환학생 여자애말고는 잘 말을 걸 기회는 없었지만, 대화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긱사에서 좀 쉬고 나오는데, 어디선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OST가 들려오는 걸 보고 다른 사람들도 다 이거 보고 있구나 싶었다.

그래서 오늘은 이김에 마녀 배달부 키키를 봤다. 영상미 예쁘고, 인물 나쁘지 않고. 다만 갈등 형성->해소->결말이 후반부에 몰린 채 너무 빠르게 이어진 것 같아서 좀 아쉽긴 했다. 아마 센과 치히로와 행방불명이 지나치게 재밌어서 상대적으로 비교가 되었던 걸지도.

작가의 이전글싱가포르 교환학생 작문일지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