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공의 두 번째 만남에 어울리는 장소
교환학생 9일차
강연 후에는 수채화 수업을 들었다. 정해진 기술이 아닌, 색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알려주신다던 교수님은 우리에게 어두운 노란색이란 존재하는지 물었다. 그러고는 노란 의자를 꺼내더니 불을 꺼 무슨 색으로 보이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초록색이라 답했다.
“세상에 어두운 노란색은 없습니다. 밝은색과 어두운색은 따로 있거든요. 노랑은 밝은색이고, 어두워지면 초록색이 됩니다. 파란색과 보라색도 마찬가지예요. 다른 색이 어두워지면 파랑이나 보라가 되는 겁니다.”
그러고 보여주신 그림의 그림자들은 전부 교수님이 말하신 ‘어두운색’으로 되어있었다. 재료를 무엇을 어디서 사야 할지 꼼꼼하게 말씀해주셔서 토요일에 혼자 나가도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교환학생 10일차
RNA 관련 과목은 RNA에 대한 현재 연구 흐름을 엿볼 수 있는 수업인 것 같았다. 난도도, 필요한 성실 정도도 커 어렵겠지만 학점도 적게 들었고, 가장 듣고 싶었던 수업 유형 중 하나니 계속 들을 예정이다.
태권도가 힘든 운동이었단 걸 잊고 있었다. 그래도 오랜만에 땀 흘리며 운동하니 밀크티가 맛있더라. 싱가포르에 있다 보면 향수를 이곳은 한국이라는 생각으로 지우려 노력하게 된다. 한국식 저녁을 먹고, 많은 운동 중 태권도부를 지원하며.
교환학생 11일차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개운했던, 혼자의 하루.
11시 즈음에 일어나 빨래를 널고, 나오자마자 내린 비에 골치 아프겠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발길을 옮기지 않았다. 티옹바루 베이커리와 서점 이야기가 한국 교환학생 단체 톡방에서 나온 적이 있었는데, 혼자만의 템포로 보고 싶다는 생각에 많은 교환학생이 팔라우를 간 오늘 근처를 방문하려고 나섰다.
도시의 감성은 저절로 만들어지는 것이지, 억지로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거리였다. 집 하나와 그림 하나에서도 생활의 흔적이 묻어나왔다. 맨 처음 찾아간 티옹바루 베이커리는 생각보다 고급스러운 분위기였다. 다양한 종류의 크루아상부터 브런치처럼 햄 등을 크루아상에 끼운 빵, 브라우니까지.
음료도 꽤 비싼 편이어서 빵만 먹을까 했지만, 생각보다 목이 타 말차라떼를 같이 주문했다. 시원하게 해달라는 말을 까먹은 것은 자리에 앉기 위해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자리가 없고 혼자 온 손님이기에 바깥에 앉았는데, 올 때도 그랬고 앉아 있을 때도 꽤 비가 와서 살짝 추웠다. 처음으로 차게 해달라는 말을 까먹은 것에 감사할 정도로.
포크를 가져오는 걸 깜빡해 그냥 맨손으로 먹었는데, 초콜릿이 들어있음에도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로 달고, 부드러운 느낌이 들면서도 바삭했다. 아몬드 초콜릿 크루아상이어서 밀크티류로 시킨 건 잘한 것 같다. 먹고 나니 어느새 비가 그치고 다시 해가 떠 있었다.
얼마나 됐다고 날씨는 다시 더워져서 다시 걷기 힘들어지기 시작했다. 두 개의 서점으로 가는 길, 단정한 골목의 벽들에는 투박하고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있었다. 한 서점의 이름은 Woods in the Books 였는데, 아동을 위한 도서가 많았고 동물 그림을 그린 엽서도 따로 판매하고 있었다. seal과 lion이라고 적힌 엽서가 눈에 가장 잘 들어와 바로 구매했다.
동화 그 자체의 느낌을 주는 곳이 여기였다면, 동화 속에서 묘사하는 ‘서재’의 느낌을 주는 곳이 book actually였다. fiction과 안쪽의 non-fiction 코너로 나누어져 있는데, 따로 판매하는 메모지나 마스킹 테이프는 일본 문구점에서 판매하는 걸 그대로 갖고 온 것 같아 구매하진 않았다.
이런 분위기의 빵집과 서점이라면 로맨스에 딱 어울리지 않는가. 그래. 주인공과 상대의 두 번째 만남이라던가. 실제로 다녀온 듯한 느낌을 조금 더 살린다면 이렇게 되겠지.
서점 안쪽으로 들어가자 아기자기한 소품들과 동화책들이 눈 안으로 들어왔다. 좁은 길을 통해 조심스레 서점 안쪽으로 들어가자, 벽면 한쪽에 동물 엽서들이 진열되어 있었다. 목탄 느낌의 그림이 주는 강렬함 때문인지 순간적으로 시선이 뺏겼다.
아이들 교육용으로 만들어서 그런 건지, A부터 Z까지 각 글자로 시작하는 동물들의 그림이 그려진, 알파벳 수만큼의 엽서가 선반 위에 나열되어 있었다. 세밀화가 아님에도 동물들의 느낌이 잘 살아 있는 그림체에 한나는 스무여 개의 그림을 감상하는데 정신이 팔려있었다.
마지막 얼룩말 그림을 보고 나자 어느새 한나의 뒤에 인기척을 내뿜고 있는 누군가가 서 있었다. 손가락으로 살짝 어깨를 건드는 느낌에 뒤를 돌아보자, 한 번 만났는데도 익숙한 얼굴이 눈앞에 있었다. 아래쪽으로 휘어지는 눈꼬리 때문인지 어딘가 안심이 되는 웃음.
“여기서 보네요.”
이름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왜인지 이곳에서만큼은 누구보다 반가운 얼굴이었다. 교환 생활이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자신에게 친절을 베푼 사람이어서일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머뭇거리는 사이, 그가 금방 다시 말을 걸어왔다.
“엽서 사려고요?”
마음에 들긴 했지만, 살지 말지 고민 중이었다. 짧은 고민 끝에 엽서 여러 개를 사는 것보다는 마음에 드는 책을 찾아서 사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음, 아뇨. 책을 좀 더 보고 싶어서.”
다만 이 서점은 내가 볼만한 책들보다는 아동 도서가 많았다. 색채가 화려해 겉보기에는 예쁜 서점이었지만, 책을 사기에는 실속이 없었다.
“책을 사고 싶은 거면 옆의 서점이 더 나을 거에요.”
그는 금방 그쪽에는 소설책이나 전공 서적도 많으니까요, 라고 덧붙였다.
싱가포르에 처음 왔을 때, 가장 예쁘다고 생각했던 게 하늘이었다. 예전에 유럽을 찾아갔을 때 늘 사진을 예쁘게 만들어주었던 강렬한 햇빛이 여기에도 있다는 생각에 사진에 대한 기대가 생겼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비가 내렸던 오늘마저도 약간의 햇빛을 받아 빛나고 있는 흰색의 골목이 사진을 가득 채웠다.
아, 원래는 당일에는 예전의 이야기를 따로 적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떠오른 내용이 있었다. 어제 수업 시간에 딱 한 학생이 교수님께 질문했다.(솔직히 개론 부분이었기에 여기 학생들도 질문을 별로 하지 않았다는 언급은 이른 것 같다.) 그런데 너무 당연한 내용이기에 교수님도 살짝 당황해하시며 설명했는데, 학생들의 분위기 또한 험악한 느낌이라 질문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라는 느낌은 아니었다. 어쩌면 질문하기를 싫어하는 건 한국의 문제가 아니라 세대의 문제일 수도 있겠다.
물감 같은, 미술 시간에 쓸 도구를 사려고 예술 쪽 물건을 모아서 파는 쇼핑센터를 들렀는데 1층에서 태국 느낌의 음악이 나오고 있었다. 메이x스토리의 황금사원에서 나올 법한 그런 노래로 말이다. 이렇게 재료를 모아 파는 쇼핑센터가 우리나라에도 있는지 궁금해졌다.
템포를 조절할 수는 있었지만, 의지할 사람이 없어서 그런지 생각보다 체력이 쉽게 떨어지는 하루였다. 그래도 여기 있으면 정이 많아지는 것 같다. 어제 고생한 태권도 때문에 알이 배겨도 아이와 엄마를 보면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게 되는 것을 보면.
기숙사로 오는 길에 하늘이 유독 예뻐서 하나 찍었다. 1월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푸르른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