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교환학생 작문일지 -6-

낯선 곳에서 예전의 꿈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by MSJ

30일 차


일주일에 수업 한 번 듣는 것만으로는 당연히 부족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수채화 실력은 그리 빠르게 늘지는 않았다. 다만 나름 마음에 드는 부분이 생기기 시작했다.

수업이 끝나고 기숙사에 와보니 택배가 와 있었다. 한국 과자가 가득 담긴, 부모님이 보내주신 상자였다. 오랜만에 먹으니 평소에 과자를 잘 안 먹는데도 이리 맛있을 수가 없었다.

31일 차


생일이라 그런지 아침부터 많은 축하 연락이 와있었다. 고등학교가 거의 세상의 전부였던 그때와 비교하면 나의 세상이 넓어졌음이 느껴진다.

감정에 잡아먹히면 감정을 담은 글을 써내지 못한다. 생일이라서 유난히 감성적이 된 건지, 아니면 안 그래도 낯선 나라에서 낯선 상황이 반복되어서 그런지 기분에 이리저리 휘둘리는 기분이다. 그게 내가 지금 소설을 쓰지 못하는 이유일지도.

KakaoTalk_20211001_122050811_01.jpg 근처 시내의 서래 갈매기에 갔을 때 찍었던 사진. 해외인 것치고는 한국 분위기가 정말 물씬났다.


W 언니와 다른 분과 함께 서래 갈매기라는 한국식 고깃집에서 저녁을 먹었다. 고기 메뉴들은 양이 많았는데, 신기해보여서 시켰던 리치(열대과일) 막걸리는 기대했던 것보다는 양이 적어서 실망했다. 맛을 보고 나니 값어치는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당히 달달하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생일 선물로는 초콜릿 상자를 받았는데, 하필 그 초콜릿이 내게는 여러 의미로 의미가 깊었던 초콜릿이라 아침부터 감성적이었던 내게는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게 했다.


34일 차 (이틀 정도 일기를 쓰지 않았다. 이 이후로는 평범히 기숙사에서만 보내는 날이 많아지면서 일기 쓰는 빈도가 점점 줄어들었다.)


열대생태학에서 조가 나눠졌는데, 조원들 전부 좋은 사람들인 것 같다. 식물 채집 수업에서나 할 것 같은 방형구 집단 세기 비슷한 걸 했다. 생각보다 힘들었고, 동시에 신기하다는 생각에 마냥 재밌었다.

KakaoTalk_20211001_122050811.jpg 이런 식으로 식물이 길게 분포해 있는 지역에서 안쪽에 있는 / 중앙에 있는 / 앞쪽에 있는 걸로 분리해서 종류를 체크했다.



내일은 우한 폐렴 문제로 대형강의인 바이오이미징이 휴강을 한단다.


36일 차


답답한 마음에 부기스 역 근처로 밥을 먹으러 나갔다. 혼자 다니니 생각보다 편안하고 날씨도 좋아서 체력이 많이 안 들었던 것 같다.

그 근방에서 꽤 알려진 경양식집과 가고 싶었던 팬케이크 집을 갔다. 팬케이크 집은 저번에 미니 팬케익 밖에 못 먹어서 아쉬웠었는데, 또 가길 잘했다고 생각할 정도로 행복해지는 맛이었다. 내 옆 테이블에는 두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는데, 어쩌다 보니 눈이 마주쳐 서로 꾸벅 눈인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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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릿 세트는 적당히 맛있었다. 사실상 하이라이트는 2겹이나 4겹을 선택해서 먹을 수 있는 두툼한 팬케이크. 토핑이나 팬케익 종류도 다양하다.


부기스 역 근처는 말 그대로 놀기 좋은 시내의 느낌이다. 두 주인공이 스트리트를 돌아다니며 귀걸이를 골라주는 장면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그런데 또 막상 쓰려다 보니 그렇게 로맨틱한 장면을 떠올리지는 못해서 금방 그만뒀다.

혼자 돌아다녔는데도 꽤 많이 즐거운 하루였다.


37일 차

수채화 수업에서 색깔을 여러 개 칠한 팽이를 돌리면 언뜻 보기에 그 색들이 섞인 것처럼 보이는 걸 가지고 이야기를 했었다. 그걸 보고 나니 뇌와 시각에 관련해서 저런 교구를 통해 초등학생들에게 쉽게 설명하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이 들었다.

문득 예전의 꿈이 떠올랐다. 소외된 아동을 위해 교구를 만드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아마 사진 위주가 될 테니 인스타그램을 활용해야 할 거고, 수익을 적게 남기되 기부할 금액도 생각할 수 있는 프로젝트로. 얀센 메커니즘을 이용한 걷는 모형 설계 같은, 일반 학부모님들도 관심을 보일 만큼 퀄리티 좋은 내용과 보장된 질의 제품을 만들 수 있어야 할 거다. 단체 봉사활동 학생들에게는 싸게 제공하고 학부모님들에게는 수익을 낼 수 있는 구조로. 하지만 이런 걸 계획하려면 얼마나 많은 시간을 투자해야 할까.

더 예전에는 실험도구 맞춤 제작회사를 세우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데, 이것보다는 그래도 쉽지 않을까 생각이 든다. 소외된 아동을 위한 과학 교구를 만드려면 정확성은 떨어지더라도 어떻게 싼값에 대체할 수 있는지 생각을 해야 한다. 예를 들면 플라스틱 구슬 같은 거에 물을 채워서 현미경처럼 쓸 수 있도록 하거나.

수채화 수업 시간에는 사포로 사진을 긁어내고 그 위에 검은색과 흰색 물감으로 톤을 주는 작업을 했다. 빛을 만들어내는 게 재밌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던 것 같았다. 색이 없어 재미없을 줄 알았는데 그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재밌다니. 내가 그렸던 것 중 기억에 남을 그림일 것 같았다.

38일 차


오늘은 열대생태학 조별과제 관련해서 교수님과 면답이 있는 날이었다. 나무들 종류가 어떻게 분포되어 있는지 지도를 그려서 갔는데, 지나치게 많이 칭찬을 들어서 약간 뻘쭘할 정도였다.

diagram field group 4.png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그리 높은 수준은 아니다. 그냥 정리한 내용을 그림으로 만든 것 정도.

RNA 관련 수업 시간에 우리 학교 교수님의 대학원생이 교수님 연구실을 소개하는 영상을 봐서 뭔가 웃겼다.

그림으로 miRNA 기작을 설명하는 영상을 보며 단번에 이해가 되는 경험을 하고 나니 이런 영상이 한국에도 많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교구 제작 방법과 활용 방법, 초/중/고 상식, 그걸 응용한 실험, 나아가 대학 생물학 정도까지 그림을 통해 설명하는 그런 채널이 있다면 상당한 도움이 되지 않을까?

아무래도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탈이다. 이런 걸 다 하려면 몇 년을 투자해도 모자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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