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첫 아이가 태어났다.
분만실에서 아이를 안자마자 "아가, 엄마야."라는 말이 눈물과 함께 터져나왔다. 아이를 품은 열 달동안 한 번도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던 엄마라는 말은 마치 십수년을 그 말을 해 온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없이 나의 첫마디로 흘러나왔다.
지독한 개인주의자로 살며 공고히 쳐놓은 나의 삶의 바운더리는 십센치도 안되는 그 작은 발의 진격을 막지 못해다. 원래부터 내 땅이었던 곳에 들어가는 것처럼 너무나 당연하게, 태연하게, 나의 모든 것을 요구하는 이 작은 인간이란 존재와의 공존에 적응하는 첫 한 달이 지나고서야 비로서 남편과 마주앉아 대화라는 것을 할 여유가 생겼다.
"나는..내가 우리 엄마같은 엄마가 될까봐 너무 겁나.."
미친들이 날뛰는 호르몬 때문이었을까, 임신과 수유기간을 거쳐 거의 1년만에 먹는 와인 한 잔 때문이었을까, 나는 이 한 마디를 토하듯이 내뱉고는 아이처럼 목놓아 울었다.
어깨를 흔들며, 꺼이 꺼이 소리를 내며 우는 건, 내가 기억하는 한 열 세 살 이후 처음있는 일이었다.
임신 기간 중 만난 선배 엄마들은 모두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다.
몸이 무거운 지금이 힘들겠지만, 막상 낳고나면 지금이 제일 편했다는 걸 알게 될 거라고 말이다. 인간이길 포기한 첫 한달을 지나, 50일의 기적, 100일의 기적..미운 두살을 지나 세 돌이 지나면 꽤나 인간다워지는 아이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그리고 아이를 낳고 나면, 이 고생을 해서 날 낳고 기른 엄마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마저 들게 된다고.
육아의 길을 먼저 밟은 선배들의 말은 대부분 맞았다. 초보 엄마로서 나 역시 비슷한 과정을 겪으며 지칠 때마다 선배들의 조언을 떠올리며, 이 또한 지나가리라를 되내였다.
언제나 그렇듯이 몸이 힘든 것은 마음이 어려운 것보다 견디기 쉬웠고, 정해진 끝이 있다는 것 아는 일을 감내하는 것은 할 말한 일이었다.
초보엄마로 살아낸 한 달동안 겪은, 칼로 찌르는 듯한 젖몸살,두시간반마다 일어나야하는 살인적인 수면패턴, 난생 처음보는 타인의 똥기저귀, 매일 한바구니씩 나오는 빨래.. 이런 난생 처음 겪어 보는 일들이 힘들지 않았을리 없었다.하지만 인생과업 중 최상급난이도에 해당하는 신생아육아의 고충에 대해서는 적어도 한번 쯤은 주워들었거나, 단단히 주의를 받았기에 고되었을지언정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대부분의 일과는 예상보다 항상 좀 더 힘들긴 했지만 모두 들었던 대로였다. 딱하나만 빼고.
분명히 아이를 낳으면 엄마가 더 애틋해지고, 엄마에게 더 고마워진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그 순간을 내심 기다렸다. 정말 그럴 수 있기를 바랬다.
불행히도 엄마가 되자, 나는 나의 엄마를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지난 이십년을 딸로서 엄마를 이해하려고 노력했고,한 인간으로서 엄마의 삶을 이해하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같은 엄마라는 위치에서 나의 엄마를 돌아보자, 이해는 분노가 되었다.
그 분노의 소용돌이는 내 온 마음을 돌고 돌아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놓은 내 마음의 보호막을 무너뜨리고는 결국 내가 가장 피하고 싶었던 두려움을 꺼내왔다.
내가 보고 자란 '엄마'는 우리 엄마 뿐이라서, 나도 결국에는 그런 엄마가 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하는 근원적인 두려움이었다.
아빠는 내가 열 세살이 되던 해 개천절에 돌아가셨다. 홀로 남은 엄마는 정신적으로도 신체적으로도 강인한 분은 아니셨다.
경제적 지지 뿐 아니라 정서적 지지도 없는 환경이었지만 청소년기를 무던히 보냈고, 23살에는 경제적인 독립까지 완성했다. 어딘가에 의지하지 않고 혼자서 모든 것을 해내며 살아낸 내 자신이 자랑스러웠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결혼 상대자를 고를 때는 반드시 가정환경을 봐야한다는 이야기가 대화 주제로 다뤄질 때면 나는 작아졌다. 폭력적인 아버지를 둔 남자는 결국에는 그 성향을 대물림하니 무조건 걸러야 한다는 결혼 적령기 여자들의 확신에 찬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이는 동성부모의 성향과 성격을 닮을 확률이 90%라는 통계 따위를 접할 때마다 나는 두려워졌다.
내가 딸을 낳는다면, 그 아이도 나처럼 작은 마음 한 켠 편하게 놓일 곳이 세상 어디에도 없어서 강제로 독립적인 아이로 크게 될까봐 몸서리치게 두려워지곤 했다. 그 눅눅한 두려움 속을 한참 방황하다보면 결론은 언제나 굳이 그런 외로운 대물림을 할 일을 만들지 말자로 이어지곤 했다.
결혼을 하지 않을 줄 알았지만, 결혼을 했고, 아이를 낳지 않을 거라 공공연히 떠들고 다녔지만, 아이를 세상에 내었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상을 나오게 하는 일은, 그에게 삶의 기쁨만 주느 것이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 또한 함께 주는 것이었다. 나는 물려줄 빚이 잔뜩 있는 엄마였고, 안타깝게도 이 세계에서는 상속포기가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부지불식간에 아이에게 물려주게 될 괴로움과 슬픔이 걱정되었고, 걱정은 몸집을 키워 두려움이 되었다.
"나는..내가 우리 엄마같은 엄마가 될까봐 너무 겁나.."
이 한마디를 뱉어놓고 통곡하는 나를 남편은 잠잠히 기다렸다. 파도치듯이 들썩이는 어깨를 감싸앉으며 입을 열었다.
"걱정마. 너는 엄마와 같은 사람이 아니야. 그리고 혹시나 네가 실수한다고 해도 걱정마. 내가 있잖아."
평생을 나를 따라다니던 두려움을 토해내고 나니, 이 두려움을 피하기보다는 정면으로 감당하고 싶어졌다.
엄마와의 관계에서 상처받고 비자발적 독립성을 평생에 걸쳐 개발하며 손 안가는 아이, 거저 키운 아이로 자라나야 했던 지난 시절을 찬찬히 톱아보고, 같은 결핍을 대물림 하지 않을 방법을 찾고 싶었다.
단 10%만 성공한다는 결핍의 대물림을 끊어내는 일을 해냐고야 말겠다고 다짐은 했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를 찾는 것부터 쉽지가 않다.
더 이상 이 무거운 마음의 결핍의 짐을 내 아이에게는 물려주지 않겠다는 단호한 마음으로 나와는 다른 사람으로 자라날 딸에게 해주고픈 가지가지 이야기를 담는 것으로 시작하기로 한다.
하지만 실은, 평생을 손 안가는 아이로 살아온 어린 시절의 내가 간절히 듣고 싶었지만, 한 번도 듣지 못한 채 마음 속에만 묻어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씩 꺼내오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