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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Oct 05. 2021

백두산 천지를 닮은 이 곳, 크레이터 레이크

Crater Lake National Park, Oregon

오래곤은 산,바다, 강 어느 것 하나 빠질 것 없는 아름다운 자연의 집합체이지만, 어쩐일인지 국립공원은 단 하나 뿐이다. 

산, 바다, 강 모든 것을 다 가진, 자연계의 금수저인 미국 웨스트코스트에 접한 주는 오레곤 말고도 두 곳이 더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씨애틀이 있는 워싱턴주 그리고 나머지 한 곳은 엘에이가 있는 캘리포니아주이다. 한국에서의 직항항공편이 있을 정도로 크고 볼 것이 많은 워싱턴주에는 3개의 국립공원이,  그리고  캘리포니아주에는 모든 주를 통틀어 가장 많은 9개의 국립공원이 있다. 미국에는 50개의 주가 있고, 2021년 기준 63개의 국립공원이 있다는 사실에 비춰봤을때 실로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닐 수 없다. 

그에 비하면 캘리포니아와 워싱턴 사이에 있는 오레곤에는 단 하나의 국립공원 뿐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그 단 하나 뿐인 국립공원이 방문객 수로 뽑아도, 인지도로 뽑아도  Top10 national park list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심지어 유명하지도 않은 국립공원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곳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저평가된 미국 국립공원 중 한 곳이자, 다른  어떤 국립공원에서도 볼 수 없는 유일 무이한 매력을 가진 곳이다. 


시작은 2019년 7월 갓 돌을 지난 해밀이와 처음으로 로드트립을 떠나기로 결심하면서부터였다. 혼자서 목도 못가누던 작디 작은 아기에서 1년만에 아장아장 걷고 있는 해밀을 보고 있노라니 돌끝맘(돌잔치가 끝나면 돌끝맘이라도 한단다. 이제 인간의 기본권을 포기하는 삶과의 작별이라는 훈장같은 것으로 생각된다.)의 주체못할 뿌듯함과 더불어 갑자기, 덜컥, 용기가 났다. 


"우리 올해 여름휴가는 오레곤-캘리포니아 로드트립입니다. 기간은 2주, 차를 타고 오레곤 포틀랜드까지 갔다가 서부 해안도로를타고 캘리포니아로 내려와서 요세미티국립공원까지 들렸다가 오는 루트이고, 가는 길에 크레이터 레이크 국립공원에서 하이킹을 하고, 바다가 있는 뉴포트에서는 조개잡이..블라블라....."


이렇게 돌만 되면 다 키웠다는 주변의 힘내라는 위로를, 진심 다 키운걸로 오해한 나의 여행계획병은 이렇게 도저버렸다. 당시에 우리가 타던 차는 픽업트럭도, SUV도, 미니밴도 아닌 빨간색 스포츠세단이었는데, 그 차에 2주치의 돌쟁이를 위한 짐을 넣자 정말 간신히 뒷자리에 카시트 하나 넣을 공간만 남았다. 

구글 맵을 찍어보자 오레곤의 유일한 국립공원 "Crater Lake National pak"까지는 17시간이 걸렸다. 


거리로는 1040마일, 1673km이다.

구글맵에 "돌쟁이와 함께 합니다." 라는 옵션을 넣을 수 있었다면 아마 예상 소요시간은 24시간, 하루가 꼬박 걸렸을 것이 분명하다. 남편과 둘이 로드트립을 할 때는 6시간 씩 이어서 운전하기도 하고, 야간에 출발해 휴게소에서 잠깐 차박으로 눈을 붙이고 다시 새벽 일찍 나머지 거리를 달려 10시간이 넘는 길을  가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와 함께 하는 로드트립은 달라도 너무 달랐다. 

일단 두,세시간마다 쉬어줘야 한다. 기저귀도 갈아줘야 하고, 카시트에 꼼짝없이 앉아있느라 지루해진 아이에게 주기적인 활동시간을 줘야 하기 때문이다. 운전을 교대로 하며 한명이 쉬는 동안 다른 한명이 운전하는 꿀팁은 무용지물이다. 운전하지 않는 한 명은 아이와 뒷자리에 나란히 앉아 놀이와 시중의 무한 루프를 몇시간씩 맴돌아야 하기 때문이다. 운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내가 주로 그 역할을 맡았는데, 차라리 운전을 6시내리 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었다. 장거리 운전을 하며 도란도란 얘기하길 좋아하던 나와 남편만의 시간은 도통 나지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아직 아가는 아가인지라, 낮잠을 꽤 자주 잔다는 것이었다. 차안에서 낮잠을 재우기 위해 나는 주로 자는 척(?) 연기를 하곤 했는데 그러다가 열에 여덟번은 진짜로 같이 잠들어버렸다. 

앞자리에 앉아 차창 밖의 새롭고 경이로운 풍경들을 눈에 담으며,
때로는 시덥지 않은 농담과 옛날 얘기 그리고 미래에 대한 얘기들로 채워졌던,
우리가 사랑하던 길 위의 데이트는 어디로 갔을까?

고난의 인고의 시간을 거쳐 드디어 도착했다. Crater lake national park에!


무려 7700년 전에 생긴 이 칼데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백두산 천지와 같은 원리로 만들어진 칼데라호이다. 백두산 천지를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어 몸살을 앓던 때가 있었는데, 그 즈음 칼데라호를 검색하다가 우연히 미국에서도 칼데라호를 볼 수 있는 이 곳을 알게 되었다. 미국에서 가장 깊은 호수이기도 한 크레이터 레이크 칼데라의 물빛을 사진 속에서 보는 순간, 버킷리스트에 이 곳을 적고 있었다. 천지보다 이 곳이 더 가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곳에서는 위에서만 칼데라를 조망하는 게 아니라, 호수 아래까지 내려가서 배를 타고 칼데라호물을 만져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호수 위에서 배를 타고 칼데라 한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Wizard Island를 가까이에서 보는 보트투어였다. 오로지 여름 석달 동안에만, 그것도 날씨가 허락하는 날만 운행하는 나의 버킷리스트 보트투어를 리스트에서 지우기 직전, 가슴이 터지듯 설레는 순간이었다. 


비지터 센터에서 보트투어에 대한 정보를 구했다.

"저 오늘 보트투어 하고 싶은데, 가능한가요?"

" 오늘 보트투어 하실 수 있어요, 날씨가 아주 좋네요."

"오예! 너무 흥분되요!(그때 한 말을 직역하면 이렇다.) 그럼 어디로 가면 되나요?"

"선착장으로 가셔야 해요. 근데 그 선착장으로 가시려면 Cleetwood cove trail 끝까지 가셔야 하는데, 1mile밖에 안되서 짧긴 하지만 보다시피 호수 아래까지 내려가야하므로 길이 아주 가파라요. 물론 흙길이고요. 아이를 업고 가려면 좀 힘들 수 있을 거에요."


순간 머리 속에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하이킹 캐리어가 있긴 하지만, 해밀이를 업고 그렇게 가파른 길을 가본 적은 없었다. 기껏해야 동네 산 정도의 경사를 경험했고, 언제나 그렇듯 올라가는 것보다 위험한 것은 바로 내려가는 길이였다. 하이킹 캐리어에 아이를 업고 하는 산행에서는 약간의 경사만 만나도 정말 큰 체력고갈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길을 내려가야하나 말아야 하나 선뜻 결정이 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아, 근데 아이가 3살 넘나요? 보트투어는 3살부터 가능해요."


순간, 오랫동안 간직해온 나의 버킷리스트를 지우고 싶은 내 욕심과 아이의 안전을 저울질 하던 내 마음은 아주 명쾌하게 정리 당했다.

"아쉽지 않아? 자기만 내려갔다 올래?"

남편이 슬쩍 물었다.

"아니야. 나중에 해밀이 크면 또 와서 같이 하자! 여기서 보는 것만으로도 좋아. 운전하느라 고생했는데 우리 어디가서 좀 쉴까?"


그리고 우린 사진을 찍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곳을 찾아 돗자리를 펴고 짹짹이에게 먹이를 주며 짧은 칼데라뷰 피크닉을 즐겼다. 

우리 언제 이 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 네가 두 발로 성큼성큼 저 호수 아래까지 내려갈 수 있게 되면!


이 곳에 오기 전날 밤, 근처에 있는 Klamath fall이라는 아주 아주 작은 마을에서 하룻밤 머물게 되었다. 커피애호가로서, 새로운 마을에 가면 그 곳에서 가장 맛있는 커피집에 들려야 하는 것은 성스러운 의식이다. 

옐프에 검색을 해보니 로스팅을 직접하는 유명한 커피집 한 곳이 있었다. 숙소에서 걸어갈 만한 거리에 있길래, 온 가족이 저녁먹기 전 산책을 나섰다. 20분 정도 걸어 마침내 도착한 가게는 닫혀 있었다. 우리가 너무 늦었나 싶어 시계를 보니, 4시 5분 전이었다. 오늘 개인사정이 있어서 닫았나 싶어 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굳게 닫힌 문에는 이렇게 영업시간이 써 있었다.

진심입니까? 2시 클로징?


미국에 산지 4년 차, 이제 5시에 클로징하는 가게들은 이상하게 여겨지지도 않는 경지에 다다랐는데.. 2시에 문을 닫는건 정말 어나더레벨이다. 

하지만 아쉽게 발걸음을 돌리며 드는 마음은 짜증이라기보다는 부러움이었다.

2시에 문을 닫아도 마을에서 가장 장사가 잘되는 까페일 수 있다는 것, 그래서 2시에 문을 닫기로 선택할 수 있다는 것, 만약 주인장이 학교 다니는 아이를 둔 부모라면, 일을 포기하지 않으면서도 3시에 맞춰 아이를 학교에서 픽업하고 아이와 온전히 오후시간을 보낼 수 있는 행복한 엄마,아빠일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에 대해 남편과 이야기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다시가서 어제 못 마신 커피를 들이키며 부러운 주인장 얼굴을 슬며시 확인해보았다.


오랫동안 꿈꿔오던 버킷리스트를 눈 앞에서 포기해도 분해하지 않고 웃으며 다음을 기약하는 것, 2시에 닫는 커피숍의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짜증을 내기보다는 가족과 저녁을 함께 보낼 수 있을 주인을 생각하며 마음 한 켠이 따스해지는 것. 이 모든 것이 엄마가 되며 새롭게 생긴 변화이다.
그리고 이런 새로운 시각이, 새로운 마음가짐이 나는 꽤나 마음에 들었다.


지우지 못한 버킷리스트를 안고 크레이터 레이크를 떠나 다음 목적지인 포틀랜드로 떠나는 길이었다.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고 나는 여전히 뒷자리에 앉아 해밀이가 지루하지않게 놀아주고, 간식을 먹이고, 던진걸 줍고, 흘린 걸 닦았다.  그렇게 한,두시간 쯤 지나자 다시 낮잠시간이 찾아왔다. 곤히 자는 해밀의 얼굴을 보며 이 세상에 나온지 13개월 밖에 안된 이 작은 아이가 엄마,아빠의 바램을 따라 이렇게 길고도 힘든 길을 따라와 나름 씩씩하게 버티고 있구나 하는 마음이 들었다. 

고개를 들어 앞자리에서 묵묵히 운전을 하고 있는 남편의 뒷통수를 보았다. 짐을 싸는 순간부터, 살인적인 장거리 운전을 도맡아 하던 때에도, 무거운 짐을 바리바리 들고 호텔을 오르락 내리락 하는 때에도 단 한번의 불평불만도 하지 않았던 이 사람이 있어서 내가 겁도 없이 돌쟁이를 데리고 2주간 길을 떠날 마음을 먹었구나 싶었다. 

우리 모두가 삶의 변화의 자리에서 각자 할 일 혹은 할 수 있는 일을 하며 그 자리를 지켜내고 있었다.


엄마가 되며 내가 잃은 것, 혹은 스스로 놓아야만 했던 것들을 되새김질 하던 때가 있었다. 이제는 받아들인 것 같다가도 불현듯 다시 목구멍으로 넘어오곤 해 다시 한참을 괴롭게 씹은 뒤 되삼켜야만 했던 그런 감정들 말이다. 그날의 그 길 위에서, 이제는 정말 그 마음들을 위장 깊숙히 삼켜낼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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