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밀이가 목도 못 가누던 시절에, 혹시나 뼈에 바람이 들까 긴바지를 입고, 혹여나 관절에 무리가 갈까 손목보호대까지 끼고 살던 그 시절에, 이 쪼꼬미가 크면 같이 하이킹을 가야지 하고 다짐했었다.
어느덧 5개월이 흘러 갓 태어난 강아지마냥 꼬물거릴줄 밖에 모르던 이 작디 작은 생명체는 목을 요리조리 잘 돌리는 까불이가 되었다. 지난하고 악명높은 아리조나의 여름이 지나고, 아름다운 가을이 찾아왔고, 때 마침 먼 곳에서 오랜 친구들이 해밀이와 나를 보기 위해 날아와주었다.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드디어 때가 되었음을 직감하곤, 아마존에서 꿈에 그리던 나의 드림백, "하이킹 캐리어"를 주문했다.
Hiking Carrier, 대충 이렇게 생겼다.
하이킹 캐리어라는 신문물을 영접한 건 2년 전 요세미티 국립공원이었다. 나의 인생 트레일로 손꼽히는 Mist trail을 걷고 있었다. 그 곳은 가파른 구간도 있을 뿐더러 바로 옆 폭포에서 떨어지는 물이 바람을 타고 날아와 1년 365일 바닥이 젖어있는 마의 구간이 있어 혼자 몸으로도 가벼운 산책길은 아니었다. 젖은 돌바닥에 혹여나 미끄러질까 조심조심 오르막에 발을 딛던 중, 꺄르르 아이 소리가 들렸다. 어이쿠, 곡소리나는 이 고개에서 웃을 수 있는 사람이 누군가 싶어 목을 쭉 뽑아 앞을 보니, 건장한 미국 아빠가 배낭같이 생긴 것에 아이를 업고 있었다. 어른들 속에서 우뚝 솟아 가장 높은 곳에서 앉아서 경치를 구경하는 아이를 보니 해맑은 꺄르르 감탄이 대번에 이해가 갔다. "아 역시 덩치 좋은 미국 아빠들은 체력이 다르구나!" 감탄하는 찰나 옆에 다른 아기 머리 하나가 더 보였다. 이번에는 두 살이 안되보이는 좀 더 작은 아기였는데, 아이의 무게를 지탱하며 흔들림없이 산을 오르는 이는 다름아닌, 엄마였다. 물론 약간 덩치 좋은 엄마이긴 했지만, 덩치라면 나도 빠지지 않기에 이거 나도 할 수 있겠다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설레이기 시작했다. 나중에 아이를 낳으면 꼭 저 배낭을 사서(그 때는 하이킹 캐리어인지도 몰랐다) 하이킹을 계속 해야지 하는 작은 소망은 그렇게 별안간 마음 속에서 자라기 시작했고, 2년 뒤 나는 정말로 드림백을 가지게 되었다.
친구 두 명과 그랜드캐년으로 떠나기 전 날 밤, 침대에 누웠는데 불현듯 걱정이 밀려왔다.
첫째, 출산 후 5개월 된 내 몸에 대해 내가 너무 과신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진짜 애낳고 5개월만에 애를 업고 그랜드캐년을 걷는게 옳은 선택인가?
둘째, 5개월 된 아기를 데리고 국립공원에 들어가 함께 하이킹 하는게 가능한 일인가? 하이킹 캐리어가 불편해서 계속 울면 어쩌지? 롯지에서 자다가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지?
평생 살며 여행 전 날 해본 적 없는 걱정들이, 엄마가 되자 속사포처럼 터져나왔다.
그래도 떠났다.
혼자였으면 엄두가 안났겠지만, 나를 독박육아의 방에서 잠시나마 구해주고자, 멀고도 먼 서울과 캐나다에서 와준 20년지기 친구들이 함께였기에 걱정은 고이 접어두었다.
2년 반 동안 총 열 세군데의 미국 국립공원을 여행하며, 가장 많이 가본 국립공원은 바로 이 곳 그랜드캐년이다. 차로 세시간 거리에 닿을 수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살고 있는 이유로, 그리고 한국사람들에게 가장 유명한 국립공원인 이유로 미국에 사는 5년 동안 5번을 왔다. 그랜드 캐년의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을 모두 만났고, 그랜드캐년이 태양과 함께 깨어나는 모습, 별 빛과 함께 잠드는 모습도 함께 했다.
개인적으로 그랜드캐년여행이 가장 쾌적한 시기는 가을이라고 생각한다. 고도가 높긴하지만 그래도 아리조나인지라 여름엔 오래 걷기엔 덥고, 겨울은 춥고 눈이 많이 온다. 봄은 언제나 좋긴하지만, 꽃이 많은 산이 아닌지라, 봄보다는 가을이 걷기에 제격이다.
그럼 걷기에 가장 좋은 곳은? 바로 그랜드캐년 빌리지를 기준으로 서쪽절벽에 위치한 포인트 들을 따라 걷는 곳이 개인적으로 가장 보물같다고 생각하는 곳이다. 그랜드캐년은 다른 국립공원에 비해서 개인자동차로 닿을 수 있는 웅장하고 멋진 포인트들도 많지만, 원래 닿기 어려운 곳이 더 예쁘고 낭만있고 그렇지 않은가?
그랜드캐년에서 유일하게 개인자가용 통행이 금지되어있고, 셔틀버스로만 다닐 수 있으며, 그것조차도 겨울에는 운행을 하지 않는 곳이 바로 Trailview overlook부터 Hermits rest까지이어지는 서쪽 트래일이다.
셔틀버스를 타고 포인트들만 구경할 수도 있지만, 절벽 옆 오솔길을 따라 그랜드캐년 협곡과 콜로라도 리버가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인생 장관을 배경삼아 원하는 만큼 원하는 속도로 걸을 수 있다. 언제든 힘들면 다시 셔틀버스를 타면 된다는 것 또한 장점이다.
그랜드캐년에서 수유타임
그 보물같은 길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걸었다. 나는 벌써 세 번이나 와봤던 길이지만, 함께 하는 사람이 누구냐, 어느 계절이냐에 따라 이 길은 늘 다른 모습이었다. 전날 밤 고이 접어두었던 걱정은 이미 그랜드캐년 절벽 아래로 나빌레라 한지 오래였다. 출산 5개월 뒤 내 몸은 생각보다 쓸만했고, 나도 좀 해밀이 좀 업어보자며 난리법석인 이모가 둘이나 함께였다. 불편해서 낑낑거리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이 무색하게도 해밀은 하이킹 캐리어에 타자마자 곤히 딥슬립에 빠져들어, 제대로 얼굴 나온 사진이 없을 정도였으니 그 편안함은 말해 무엇하랴.
그날 밤 롯지에서 식은 피자를 먹으며, 우리는 밤이 늦도록 깔깔댔다. 중학생 수련회 때 얘기부터 시작해, 지난 연애얘기를 거쳐 곤히 잠든 해밀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날 꼭 닮은 이 생명체의 탄생에 경이로움을 느꼈다.
가장 좋아하는 그랜드 캐년 서쪽 절벽을 자박자박 걸으며 친구들과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벅찬 행복인데 바로 그 곳에 해밀이가 함께 존재했다. 아기가 있어도 여전히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음을 하나 하나 두드려 확인하는 중이었고, 그리고 그 속에서 이전의 내가 절대 알지 못했던 감탄의 순간들을 만나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