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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크랜디아 Aug 10. 2021

인생 5개월 차, 미국국립공원 도장깨기파티원이 되었다.

아기와 함께 미국국립공원 도장깨기 #프롤로그

서른 둘, 적지도 많지도 않은 나이에 결혼이란 것을 하게 되었다. 

"나 결혼한다." 라고 툭 던진 공표에 오랜 친구들의 반응은 두가지였다.

기혼 친구들의 반응 : "너도 이 세계(?)에 발들일 줄 몰랐다만, 어쨌든 축하한다."

미혼 친구들의 반응 :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만은 내 뒤에 남아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쨌든 축하한다."

나 역시도 이처럼 이른 나이에 내 짝을 만날 수 있을 것이란 상상을 해본적이 없기에 친구들의 놀람과, 놀림, 깊고 깊은 배신감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다. 


그 시절의 나는 하이킹이 좋아 네팔 안나푸르나에서 일주일간 먹고 자고 걷기만 하기도 했고, 스킨스쿠버에 빠져 한달간 태국의 작은 섬에 살며 매일 같이 먹고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만 했던 전력이 있는 명실상부, 자타공인 자연덕후였다. 나의 여행 목적지는 언제나 만나고 싶은 자연이 있는 곳이었고, 여행이 아닌 일상에서도 등산, 자전거, 마라톤, 캠핑 처럼 자연과 함께 하는 취미로 속속들이 나만의 시간을 채우곤 했다.


그리고 이 수 많은 것들을 함께 즐길 수 있는 짝꿍을 만나, 나의 결혼생활이란 자연덕후 싱글생활의 종지부가 아니라, 확장판이 될 것만 같은 기대감에 부풀어 올랐다. 실제로 우리는 결혼 후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자연으로 함께 달려나갔다. 시간이 없다면 차에서 차박을 하면서 대여섯시간 거리에 있는 바다에 1박2일로 다녀오기도 했고, 시설이라고는 덩그라니 푸세식 화장실 하나 뿐인 산속 싶은 자작나무 숲 캠핑장에 꾀죄죄한 모습으로 텐트에서 일어나 커피와 라면을 먹고 한참 멍 때리다 오기도 했다.


그리고 이 모든 소소한 호사들은 결혼 2년만에 첫 아이를 가지며 휴지기를 가지게 되었다. 셋째를 임신했을 때 말도 탔다는 카우보이의 고장, 동네 할머니의 쿨함에 비하면 나는 그보다는 보수적일 수 밖에 없는 초보 임산부였고, 말은 커녕 그 좋아하는 자전거 안장에도 한번도 앉지 않았다. 그렇게 임신 기간이 지나고 출산을 하자 이번에는 느슨해진 관절과 뼈 마디마디가 원상복귀 될 때까지 최소 두 달정도는 몸을 사려야 했다. 


"아, 죽겠다. 나가서 걷고, 보고, 감탄하고 싶다."


어느 날 뱉어진 말이었다. 유일하게 만나는 자연이라고는 거실의 커다란  서향 창문으로 보이는 노을 뿐이었던 평범한 신생아 육아 일상의 한 틈에 그 마음이 갑자기 예고도 없이 끼어들었다.

필사적으로 우유병을 빨고 있는 내 품 속 아이를 바라보았다. 요근래 들어 목을 혼자서 좀 가누려고 하는 것 같았다. "네가 목만 가누게 되면 널 들쳐 업고 이 세상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여주러 나갈거야!"라고 인스타그램에 떠벌렸던 과거의 물정모르는 내가 야속했다. 


너와 함께 자연을 다시 만나러 가기 까지 얼마나 걸릴까?


현실감이란 1도 없었던 임산부시절의 내가 생각한 "네가 목을 가눌 때 즈음이면"보다는 조금 더 걸렸지만, 그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다가왔다. 이제 꽤나 사람답구나 싶어 매일 매일이 대견함과 뿌듯함으로 채워지던 5개월 차, 아이는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미국국립공원 도장깨기의 파티원이 되었다.


결혼 후 미국에 오기 직전, 내가 이 곳에 있는 동안 가장 하고 싶은 일이었다. 실제로 임신 전에는 여행 계획은 무조건 국립공원을 기점으로 잡았다. 가고싶은 국립공원을 정하고, 그 주변에서 캠핑이든, 낚시든, 온천이든 뭐든 다른 계획을 덧붙여 세웠다. 그 덕에 가까이 있는 그랜드캐년은 족히 5번은 넘게 간 것 같고, 가장 좋아하는 하이킹 트레일이 있는 요세미티도 두 번을 갔으며, 임신 중에도 태교여행은 하얀 모래사막을 보러 화이트샌드국립공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꽤나 오랜 쉼을 거쳐 다시 그랜드캐년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동행과 함께 간 곳이지만, 인생 5개월 차와는 처음이었다.


5개월 차, 첫 국립공원 여행을 시작으로 캠핑과 로드트립이 버무려진 강행군 미국국립공원 도장깨기는 아이가 세 돌이 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연공서열과 장유유서의 도리에 걸맞춰 우리 집에서 가장 자연덕후 짬이 오래되고, 나이 또한 가장 많이 먹은 내가 이 프로젝트의 대장이다. 대장이라고 해봤자, 특별한 인센티브는 없고 어디에 가고, 무엇을 할 것인지를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있을 뿐이다. 권한이라고 표현하지만 사실은 여행스케줄을 조정하고, 교통편과 숙박, 놀이거리를 조사해서 예약하고, 짬짬히 곁들일 설명을 위해 잡지식을 사전에 공부하는 여행사가이드 같은 역할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고 잘하는 일이라 큰 불만 없이 해내고 있다.

나만큼의 자연덕후는 아니지만 어디 무인도에서도 베어그릴스 아저씨처럼 살아나올 것만 같은 손재주와 임기응변을 갖춘 짝꿍은 대장의 진두지휘 아래 실제 일을 해내는 행동대장을 맡고 있다. 그렇다. 실은 기사이자, 짐꾼이자, 집사이다. 하지만 운전병 출신답게 장거리, 야간운전 할 것 없이 모두 불만없이 홀로 해내며, 꼼꼼함을 무기로 미리 만들어둔 체크리스트를 지워가며 내 손이 안가게끔 짐을 야무지게 싸곤 한다. 

그리고 우리 프로젝트에 뒤늦게 합류한 미성년자 파티원은 그렇게 서로의 합이 맞아 짐이 다소 덜어진 우리의 손 위에 다시 새로운 할일들을 얹어줘서 "일복은 타고난다."라는 옛말이 틀린 거 하나 없다는 믿음을 갖게끔 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아이와 함께 길을 나선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은 일이다. 아이와 함께 열 세군데의 국립공원을 2년 반에 걸쳐 여행하며 단 한번도 쉬운 적은 없었다. 하루에도 열두번씩 "아 집에나 있을 걸..."하는 후회가 드는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것이 작디 작은 아이와 함께 하는 여행의 디폴트이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쉽지 않은 여정은 하면 할 수록 분명히 나아진다. 함께 할 수 있는 것들이 늘어나고, 혼자만의 시간도 생긴다. 그리고 언제나 돌아오는 길에는 뒷자리 카시트에서 새까맣게 탄 얼굴을 툭 떨구고 곤히 자고 있는 아이 얼굴을 룸미러로 비춰보며, 둘이 함께 얘기한다. "조금(?) 힘들긴 했지만, 그래도 함께 오기 잘했어. 정말 좋았어. 그치?" 집에 가고 싶었던 고난의 순간들은 조금 힘들었던 기억으로 각색되고, 다신 오지 말자고 다짐했던 굳은 결심은 햇볕에 타버린 아이 얼굴만큼이나 새까맣게 잊혀져버린다. 


우리의 특기와 기질에 잘 맞는 역할 분담에 맞춰 이제는 오랫동안 연습한 배드민턴 복식조처럼 척척 여행준비와 실행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 한켠이 뿌듯하다. 그리고 언젠가는 우리 셋이 눈빛만 봐도 내가 뭘해야하는지 아는 그런 때가 오겠지, 기대하며, 우리는 설레는 마음을 갖고 또 다시 떠난다.


걷고, 보고, 감탄하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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