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침묵의 무게
한서연과 함께 거리로 나섰다. 그녀는 언어가 없는 세상에서도 오롯이 자신을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중요한 증거였다. 언어 없이도, 기억 없이도, '나'라는 존재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을 그녀가 증명하고 있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언어가 아닌, 다른 방식으로 소통하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그녀의 손짓, 표정, 그리고 눈빛. 그것들은 단어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품고 있었다.
우리는 폐허가 된 도서관에 들어섰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어린이 도서 코너로 향했다. 그리고는 낡은 동화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그녀는 책을 펼쳐 내게 보여주었다. 그 안에는 삐뚤빼뚤한 글씨로 ‘사랑하는 우리 딸 서연이에게. 소리가 없어도, 너의 세상은 언제나 이야기로 가득하기를. -아빠가’ 라고 적혀 있었다. 그 문장의 몇몇 단어들은 이미 텅 빈 공간으로 변해 있었다. ‘사랑하는’, ‘이야기’ 같은 단어들이 하얗게 지워져 있었다.
그녀는 텅 빈 단어의 자리를 손가락으로 쓸었다. 그녀의 눈빛이 세차게 흔들렸다. 나는 그녀의 눈에서 깊은 슬픔을 읽었다. 그녀는 '첫 번째 침묵' 이전부터 침묵의 세계에 살았지만, 언어의 소멸은 그녀에게서도 소중한 것을 앗아가고 있었다. 글로 소통하던 유일한 가족과의 연결고리, 아버지가 남긴 마지막 문장들이 눈앞에서 사라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에게 언어는 소리가 아니라, 아버지의 사랑을 증명하는 유일한 흔적이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감쌌다.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지만, '위로'라는 단어는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그저 그녀의 슬픔을 함께 느끼는 것밖에는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나를 보며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괜찮아’가 아니라, ‘너도 잃었구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상실을 통해 비로소 연결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