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기억의 백지화와 단어의 규칙

1부: 침묵의 무게

by 몽환

한서연의 따뜻한 손이 내 손을 떠나자, 연구소의 공기는 다시 차갑게 식었다. 그녀는 내게 '함께'라는 단어를 알려주려 했다. 그 단어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그 단어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꼈다. 왠지 모르게, '함께'라는 단어가 사라지면, 그녀의 존재마저 희미해질 것 같아 두려웠다. 언어와 기억은 그렇게 끈끈하게 엮여 있었다.


나는 내 수첩을 다시 펼쳐 보았다. 연필로 쓴 '마지막'과 '시작'이라는 단어는 여전히 선명했다. 하지만 그 아래, 내가 쓰려 했던 수많은 단어들은 이미 흐릿해져 있거나, 아예 텅 빈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마치 내가 그 단어들을 쓴 기억마저 사라져버린 것처럼. 나는 무의식적으로 내 기억 속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떠올리려 애썼다. 첫사랑의 이름, 엄마의 웃음소리, 그리고… 음… 내 첫 논문 제목.


첫사랑의 이름이 무엇이었더라? 분명히 세 글자였는데. '미...'로 시작했던가? 입술을 움직여보았다. '미애', '민서', '미소'... 단어들은 머릿속에서 파편처럼 흩어졌다. 나는 그 이름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녀와 어떤 추억을 공유했는지조차 기억나지 않았다. 기억은 언어라는 그릇에 담겨 있었다. 그 그릇이 깨지자, 내용물도 함께 쏟아져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덜컥 겁이 났다. 엄마의 웃음소리는? 다행히 소리는 기억났다. 하지만 그 웃음이 왜, 어떤 상황에서 터져 나왔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내 머릿속의 시냅스 회로가 단어라는 연결고리를 잃고 끊어져 버린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내 기억의 백지화를 막기 위해, 무엇이든 해야만 했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언어를 연구하는 학자가 아니었다. 나는 내 기억을 지키려는, 한낱 평범한 인간에 불과했다.


나는 무릎을 꿇었다. 내 존재의 증명은, 언어와 기억에 갇혀 있었다. 언어라는 감옥이 무너지자, 기억이라는 죄수도 함께 사라지고 있었다. 나는 내 정체성이 통째로 사라지는 공포를 느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다. 과거도 없고, 미래도 없는. 오직 '지금'만 존재하는, 감각의 노예가 되어버릴 것이다.


나는 수첩의 한 페이지에, 내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감정의 단어를 조심스럽게 적었다. '두려움.'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사랑', '희망' 같은 추상적인 개념어들이 먼저 사라진 반면, '두려움'처럼 생존과 직결된 원초적인 감정의 단어는 끈질기게 남아있다는 것을. 어쩌면 단어의 생명력에도 규칙이 있는지도 몰랐다. 추상적인 관념일수록 먼저 증발하고, 본능에 가까울수록 마지막까지 남는 것. 이 가설이 맞다면, ‘마지막’과 ‘시작’이라는 단어가 남은 이유도 설명이 가능했다. 그것이야말로 모든 존재의 가장 근원적인 상태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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