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새로운 언어
우리는 돌벽에 새겨진 기호들을 따라 유적의 가장 깊은 곳으로 향했다. 그곳은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두운 동굴이었다. 나는 불안했다. 하지만 한서연은 내 손을 잡고 조용히 걸었다. 그녀의 손은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등대 같았다. 우리는 서로의 손바닥에 '안심'이라는 감정을 그려 넣었다. 그녀는 그제야 미소를 지었고, 나는 비로소 숨을 쉴 수 있었다.
동굴의 끝에는 거대한 석판이 놓여 있었다. 여느 석판과는 달랐다. 표면이 매끄러웠고, 그 위에는 단 하나의 기호만 새겨져 있었다. 이 기호는 이전에 보았던 것들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것은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형태가 없었다. 마치 빛과 어둠, 존재와 비존재의 경계에 놓인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기호를 보는 순간, 몸의 모든 감각이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기호에 닿았다. 손끝이 닿는 순간, 거대한 충격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것은 소리도 아니었고, 빛도 아니었다. 어떤 감각이었다. 내가 세상에 존재하기 전부터, 아니, 언어라는 개념이 존재하기 전부터 있었던 원초적인 감각. 나는 그것을 느꼈다. 그것은 단어가 아니었다. 그것은 '의미' 그 자체였다.
내 머릿속에서 수많은 이미지들이 폭풍처럼 스쳐 지나갔다. 거대한 우주가 탄생하는 순간, 별들이 폭발하는 소리, 그리고… 아주 오래전, 인간이 처음으로 단어를 발음하던 순간. 나는 그 모든 것을 단어 없이, 그저 감각만으로 느꼈다.
나는 깨달았다. 이 '원초 언어'는 우리가 알고 있는 소통의 도구가 아니었다. 그것은 모든 존재의 근원에 닿는 통로였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단어가 아니라, 이 원초 언어와 연결될 수 있는 능력 그 자체였다. 언어가 사라지면서 우리는 그 능력을 되찾고 있었던 것이다.
한서연은 내 곁에 서서 조용히 눈을 감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이 감각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언어가 사라지기 전부터 이 세계에 더 가까이 있었을 테니. 나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을 통해, 나는 그녀의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평화'였다. 혼돈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내면의 평화. 그녀는 언어가 사라지는 것을 순리로 받아들인 것이 아니라, 이미 언어 없는 세상의 평화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