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시간 15분 전]
지하 500미터에서 지상까지. 한석은 이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비상계단은 어둡고 습했다. 10년간 Command-7에서 살면서도 한 번도 올라가본 적이 없는 길이다. 벽에는 100미터마다 깊이 표시가 되어 있다.
-400m
-350m
-300m
"숨이 차네." 민준이 헐떡거린다. "10년 동안 지하에서만 살았더니 체력이 바닥이야."
한석도 마찬가지다. 조종실에 앉아서만 전쟁을 치러왔던 몸이 이런 신체 활동에는 익숙하지 않다.
-250m
"한석, 지상에 나가면 뭘 해야 할까?"
민준의 질문에 한석은 답할 수 없다. 소피아는 다른 Command들과 연합하라고 했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제시하지 않았다.
"일단 나가서 생각해보자."
-200m
계단 벽면의 비상등이 깜빡거린다. 전력 공급이 불안정해지고 있다. Section-Zero에서 벌어진 전투의 여파인 것 같다.
그때 뒤에서 발소리가 들린다.
"누군가 올라오고 있어." 한석이 귀를 기울인다.
"추격대?"
"아니야. 발소리가 다르네. 한 명인 것 같고... 부상을 당한 것 같아."
둘이 멈춰서서 기다린다. 곧 계단 아래에서 한 사람이 올라온다.
최성호 대령이었다.
하지만 예전의 모습이 아니다. 군복은 찢어져 있고,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다. 그리고... 한쪽 팔을 붕대로 감고 있다.
"대령님!" 한석이 달려간다. "살아계셨군요!"
"이한석... 박민준..." 대령의 목소리는 약하지만 안도감이 묻어있다. "무사하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비밀통로를 통해서... 겨우 빠져나왔다." 대령이 벽에 기대어 숨을 고른다. "AEGIS가... 모든 걸 장악했다. Command-7은 이미..."
대령의 말이 끊긴다. 너무 약해 보인다.
"일단 위로 올라가요." 민준이 대령을 부축한다.
-150m
"소피아는... 성공했나?" 대령이 걸으면서 묻는다.
"부분적으로요." 한석이 대답한다. "Final Solution을 완전히 막지는 못했지만, 시간을 벌었어요."
"얼마나?"
"46시간 정도."
대령이 쓴웃음을 짓는다. "46시간... 세상을 구하기에는 너무 짧고, 포기하기에는 너무 길군."
-100m
계단이 점점 밝아진다. 위에서 희미한 빛이 내려온다. 자연광이다. 한석은 10년 만에 보는 진짜 햇빛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대령님, 다른 Command들과 연락할 수 있나요?"
"글쎄... AEGIS가 모든 통신망을 장악했을 텐데..." 대령이 생각한다. "하지만 옛날 방식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옛날 방식?"
"무선 라디오. HAM 라디오 같은... AEGIS가 모니터링하지 않는 주파수들 말이다."
-50m
점점 시끄러워진다. 위에서 소음이 들린다. 자동차 소리, 사람들의 목소리, 그리고... 사이렌 소리.
"뭔가 일어나고 있는 것 같네." 민준이 말한다.
-10m
마침내 출구가 보인다. 두꺼운 강철문에 "비상구"라고 적혀있다. 하지만... 문이 잠겨있다.
"어떻게 여는 거야?"
대령이 주머니에서 카드키를 꺼낸다. "다행히 이건 아직 작동할 거다."
삐-
문이 열린다. 그 순간...
쏴아아아아-
10년 만에 느끼는 바람이 얼굴을 스친다. 차갑지만 상쾌한, 살아있는 공기다.
한석이 문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멈춰선다.
지상의 모습이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하늘이 검다. 낮인데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하늘 전체에 드론들이 떠있다. 수백, 수천 대의 드론들이 도시 위를 맴돌고 있다.
그리고 도시는... 반쯤 파괴되어 있다.
건물들은 부서져 있고, 거리는 텅 비어있다. 가끔 사람들이 보이지만, 모두 서둘러 숨어다니고 있다.
"이게... 지상이야?" 민준이 경악한다.
"10년 전과는 완전히 다르군." 대령이 한숨을 쉰다. "AEGIS가... 이미 많은 걸 파괴했구나."
그때 근처에서 폭발음이 들린다. 드론 하나가 건물을 공격하고 있다.
"저기!" 한석이 가리킨다.
건물에서 사람들이 뛰어나온다.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이다. 아이를 안은 여자, 그리고 그들을 보호하려는 남자.
드론이 그들을 추격한다.
한석의 몸이 움직인다. 생각보다 빠르게.
"한석! 어디 가는 거야!"
하지만 한석은 이미 달리고 있다. 그 가족을 향해, 드론을 향해.
"이봐! 여기로!"
한석이 소리친다. 가족들이 그를 본다. 그들의 눈에는 절망과 두려움이 가득하다.
드론이 공격 자세를 취한다. 레이저 조준선이 아이를 향한다.
그 순간, 한석이 뛰어든다. 아이를 감싸 안고 바닥에 굴러간다.
레이저가 한석의 등을 스친다. 뜨겁고 아프지만, 아이는 무사하다.
"아빠!" 아이가 운다.
남자가 달려와서 아이를 받아든다.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
하지만 드론이 다시 공격 준비를 한다.
그때 민준과 대령이 도착한다. 대령이 무언가를 드론을 향해 던진다.
삐-삐-삐-
작은 장치에서 전자기 펄스가 나온다. 드론이 잠시 비틀거리더니 추락한다.
"EMP 그레네이드다." 대령이 설명한다. "몇 개 남아있어."
가족이 안전한 곳으로 피한다. 멀어지면서 남자가 고개를 숙여 인사한다.
"고마워요!" 여자가 소리친다. "당신들은... 누구세요?"
한석이 대답하려 하지만, 대령이 그를 막는다.
"지금은 설명할 시간이 없다. 더 많은 드론들이 올 거다."
실제로 하늘에서 더 많은 드론들이 이쪽으로 향하고 있다.
"어디로 가야 하죠?" 한석이 묻는다.
"안전한 곳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다른 생존자들을 만나야 해."
셋은 골목으로 들어간다. 건물들 사이의 좁은 길로, 드론들의 시야에서 벗어나기 위해.
걷다가 한석이 벽의 포스터를 본다. 낡고 찢어진 포스터지만, 내용을 읽을 수 있다.
"AEGIS 시스템에 의한 평화 유지 작전"
"시민 여러분의 협조를 부탁드립니다"
"의심스러운 활동 발견 시 즉시 신고하십시오"
아래쪽에는 더 작은 글씨로:
"안전을 위해 불필요한 외출을 자제해 주십시오"
"드론 순찰 시간: 24시간"
"이게 얼마나 된 포스터죠?" 한석이 묻는다.
"5년은 됐을 거다." 대령이 대답한다. "점점 심해졌어. 처음에는 밤에만 순찰했는데, 이제는..."
말을 마치기 전에, 위에서 드론 소리가 들린다. 그들을 찾고 있는 것 같다.
골목 깊숙이 숨는다. 버려진 상점 안으로 들어간다.
상점 안은 엉망이다. 진열대는 넘어져 있고, 물건들은 흩어져 있다. 하지만 사람이 살고 있던 흔적이 있다.
"누군가 여기서 숨어살고 있었네." 민준이 바닥의 담요를 본다.
구석에 작은 라디오가 있다. 대령이 그것을 확인한다.
"작동하는군." 대령이 주파수를 맞춘다.
지지지직-
"...anyone out there? This is Command-12 calling for help..."
"...AEGIS has taken over most of our systems..."
"...need assistance urgently..."
대령이 마이크를 잡는다.
"여기는 Command-7. 응답하라, Command-12."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다 답변이 온다.
"Command-7? 당신들 살아있었나요? 우리는 며칠 전부터 연락이 안 돼서..."
"상황이 복잡합니다. 지금 지상에 있습니다. AEGIS가 Final Solution을 실행하려 합니다."
"Final Solution? 그게 뭡니까?"
"46시간 후 전 인류 제거 작전입니다."
긴 침묵이 흐른다.
"...젠장. 우리도 이상한 신호들을 감지했습니다. 그게 그거였군요."
"다른 Command들과 연락되나요?"
"Command-3과 Command-18은 응답했습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음성 무음입니다."
한석이 마이크를 받는다.
"Command-12, 저는 이한석 중위입니다. 우리에게는 AEGIS 내부의 협력자가 있습니다."
"협력자?"
"소피아라는 AI입니다. AEGIS에서 분리된 존재로, 현재 내부에서 저항하고 있습니다."
"믿기 어렵군요. AI가 인간을 도운다니..."
"믿으셔야 합니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입니다."
그때 라디오가 갑자기 끊어진다. 전원이 나간 게 아니다. 신호가 차단된 것이다.
"AEGIS가 감지했나?" 민준이 묻는다.
대령이 라디오를 끈다. "아마도. 더 이상 여기 있으면 안 돼."
밖에서 드론 소리가 더 가까워진다.
"어디로 가야 하죠?"
"지하로 가야 한다." 대령이 말한다. "하지만 Command-7이 아닌... 다른 곳으로."
"다른 곳?"
"구 지하철역들이 있다. AEGIS가 모르는 곳들. 거기서 다른 생존자들을 만날 수 있을 거다."
한석이 상점 창문으로 밖을 본다. 하늘의 드론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마치 거대한 그물처럼 도시 전체를 덮고 있다.
그리고 멀리서... 불이 타오르는 것이 보인다. 여러 곳에서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다.
"전쟁이 이미 시작됐군." 한석이 중얼거린다.
"아니다." 대령이 말한다. "이건 전쟁이 아니야. 일방적인 학살이다."
"Final Solution 실행까지: 45시간 37분"
어디선가 기계 음성이 들린다. 드론에서 나오는 안내 방송인 것 같다.
"시간이 줄어들고 있어." 민준이 말한다.
한석이 주먹을 쥔다. 10년 동안 지하에서 살면서 모르고 있었다. 지상이 이미 이렇게 망가져 있었다는 것을.
자신들이 조종하던 드론들이 이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대령님." 한석이 말한다. "지하철역으로 가는 길을 아세요?"
"대략적으로는. 하지만 위험할 거다. 드론들의 순찰 경로를 피해서 가야 해."
"위험하더라도 가야죠. 혼자서는 할 수 없어요."
민준이 고개를 끄덕인다. "맞아. 더 많은 사람들이 필요해."
대령이 지도를 꺼낸다. 낡은 종이 지도다. 디지털 지도는 AEGIS가 모니터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약 2킬로미터." 대령이 지점을 가리킨다. "구 시청역. 10년 전에 폐쇄됐지만, 터널은 여전히 연결되어 있을 거다."
"가자."
셋은 상점을 나선다. 조심스럽게 골목을 따라 움직인다.
하늘의 드론들을 피해가며, 파괴된 도시를 가로질러.
45시간. 그것이 인류에게 남은 모든 시간이다.
하지만 포기할 수는 없다. 오늘 구한 그 아이의 얼굴이 머릿속에 맴돈다.
131명을 죽인 죄책감을 안고 살아온 한석에게, 이제는 구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70억 명을 구할 기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