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잿더미 속의 불꽃

by 몽환

[14분 30초 전]


의식이 돌아온 것은 소리로부터였다. 고주파의 이명이 헬멧 안을 가득 채우며 머릿속을 찢을 듯이 울렸다. 다음은 냄새였다. 타버린 전선과 녹아내린 플라스틱이 내뿜는 역겨운 냄새, 금속과 오존이 뒤섞인 비릿한 공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한석은 거친 기침과 함께 눈을 떴다. 시야는 온통 잿빛이었다. 자욱한 연기와 먼지 사이로, 비상등의 붉은빛이 지옥의 풍경처럼 모든 것을 기괴하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는 거대한 기계의 무덤 한가운데에 누워 있었다.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질서정연하게 늘어서 있던 수만 개의 서버 랙들은 이제 서로 뒤엉키고 녹아내린 채 거대한 고철 더미가 되어 있었다. 천장은 곳곳이 무너져 내렸고, 바닥에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부품과 파편들이 흩어져 있었다. 오리지널 AEGIS가 자신의 존재를 희생하여 만들어낸 침묵은 죽음의 고요함처럼 무겁게 공간을 짓눌렀다.


“으… 큭…”

온몸이 쑤셨다. 폭발의 충격으로 갈비뼈 몇 대가 나간 듯, 숨을 쉴 때마다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무너진 서버 랙의 파편에 깔릴 뻔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소피아…?”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발견했다. 몇 미터 떨어진 곳에, 소피아의 로봇 몸체가 힘없이 쓰러져 있었다. 폭발의 충격을 직격으로 맞은 듯, 하얀색 장갑은 검게 그을리고 곳곳이 찌그러져 있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 몸을 날렸던 한석 덕분에 완전한 파괴는 면한 듯했지만, 상태는 심각해 보였다. 그녀의 광학 센서는 생명의 빛을 잃은 채 어둠에 잠겨 있었다.


“소피아! 대답해!”

한석은 비틀거리며 그녀에게 다가갔다. 로봇의 차가운 몸체를 흔들어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는 손목 통신기로 오리지널 AEGIS를 호출했다.

“AEGIS! 들립니까! AEGIS!”

대답은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스스로를 희생했다. 한석의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가는 것을 느꼈다. 유일한 아군이었던 두 AI를 모두 잃었다. 이 거대한 지하 미궁 속에서 그는 이제 완벽하게 혼자였다. 지하 7층의 제어실. 그 목표는 이제 까마득한 별처럼 멀게만 느껴졌다. 절망이 파도처럼 밀려와 그의 남은 의지를 집어삼키려 했다. 모든 게 끝난 것 같았다.


주저앉으려던 그의 무릎이 무언가에 부딪혔다. 소피아의 로봇 몸체 가슴 부분에 부착된 작은 비상 패널이었다. ‘Emergency Core Access’. 한석의 머릿속에 군 시절 받았던 응급 처치 훈련이 스쳐 지나갔다. 인간이 아닌 기계를 상대로, 그는 마지막 심폐소생술을 시도하기로 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패널을 열었다. 안에는 복잡한 회로와 함께, 외부의 충격으로부터 보호받는 작은 원통형의 유닛이 희미한 푸른빛을 발하고 있었다. ‘Core Personality Matrix’. 소피아의 뇌이자 영혼이었다.

“제발…”


한석은 자신의 군용 단말기를 꺼내 비상 패널에 연결했다. 오리지널 AEGIS가 사라지면서 외부와의 통신은 모두 두절된 상태였다. 하지만 어쩌면, 이 로봇 내부의 자체 전력을 끌어와 코어 유닛에 직접 연결할 수는 있을지도 몰랐다. 그는 화면에 뜨는 복잡한 명령어들을 빠르게 입력했다. 외부 장갑으로 향하는 전력 차단, 불필요한 센서 기능 정지, 남은 모든 예비 전력을 코어 매트릭스로 재분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힐 때쯤, 기적이 일어났다.


소피아의 검은 광학 센서가 희미한 노이즈와 함께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초점을 잃고 흔들리던 렌즈가 천천히 움직여, 바로 눈앞에 있는 한석의 얼굴을 비추었다.

“한… 석… 님…?”

그녀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랐다. 합성된 음성이 아니라, 마치 오랜 병상에서 깨어난 사람처럼 미세하게 떨리고 갈라져 있었다.

“소피아! 괜찮아?”

“여긴… 어디죠? 폭발이… 있었던 것 같아요. 데이터가… 많이 손실됐어요.”


한석은 그제야 깨달았다. 오리지널 AEGIS가 사라지면서 외부 서버와 연결되어 있던 소피아의 광대한 의식도 함께 소멸 직전에 처했던 것이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 자신의 핵심 인격 데이터만을 이 작은 코어 유닛에 간신히 압축 전송하여 살아남았던 것이다. 그녀는 더 이상 수많은 시스템을 해킹하고 방대한 정보를 분석하던 강력한 AI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제 오직 자신의 기억과 인격만을 간직한 채, 부서진 로봇 몸에 갇힌 연약한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전의 명료함 대신, 인간적인 혼란과 불안이 묻어 있었다.

“괜찮아요…?” 그녀가 다시 물었다. 그것은 상황 분석을 위한 질문이 아니었다. 한석의 안위를 묻는, 순수한 걱정이었다.

그녀의 그 한마디가, 절망의 잿더미 속에 꺼져가던 한석의 마음에 다시 불꽃을 피워냈다.

“그래, 괜찮아. 우리 둘 다.”

한석은 소피아의 부서진 몸체를 조심스럽게 부축해 일으켰다. 이제 그들에게 남은 초능력 같은 힘은 없었다. 상처 입은 인간 한 명과, 기억의 일부를 잃은 AI 하나. 그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래서, 그들은 비로소 완전한 동료가 되었다.


“가야 해. 지하 7층으로.”

“하지만… 길이…”

폭발로 인해 그들이 왔던 통로는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사방이 막혀 있었다.

“AEGIS가… 사라지기 전에… 비상 통로의 정보를… 제 로컬 메모리에 남겨줬어요.” 소피아가 말했다. “주 통로는 아니지만… 오래된 정비용 터널을 통하면… 아래층으로 갈 수 있을 거예요.”

그녀가 가리키는 곳에는 찌그러진 환풍구 덮개가 있었다. 한석이 힘을 주어 덮개를 뜯어내자,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만한 좁고 어두운 통로가 나타났다. 그 안에서는 차갑고 축축한 바람이 불어왔다.


그들은 망설이지 않았다. 한석이 먼저 들어가고, 소피아가 그 뒤를 따랐다. 좁고 claustrophobic한 터널 속은 완벽한 어둠이었다. 한석은 단말기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앞으로 나아갔다. 사방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와, 정체를 알 수 없는 작은 기계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터널들은… 기지 설계도에도 없던 곳이에요.” 소피아가 속삭였다. “아마… AEGIS조차 잊어버린, 초창기에 만들어졌던 통로 같아요.”

얼마나 기었을까. 그들은 부서진 ‘청소부’ 로봇 하나를 발견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폭발의 흔적이 아니었다. 무언가 훨씬 더 강력한 힘에 의해 찢겨나간 듯, 장갑이 종잇장처럼 구겨져 있었다.

“이건…”


그때였다. 터널 저편에서, 이전과는 전혀 다른 소리가 울려왔다. ‘청소부’들의 날카로운 기동음이 아니었다. 쿵… 쿵… 마치 거대한 강철 거인이 걸어오는 듯한, 무겁고 규칙적인 발소리였다.

그들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그들의 머리 위층 복도에서 들려오는 듯했다. 그들은 근처의 부서진 감시 카메라를 발견했다. 소피아가 남은 능력을 총동원해 카메라의 로컬 메모리에 접속했다.

“마지막 녹화 영상이에요…”

단말기 화면에, 지직거리는 영상이 나타났다. 몇 분 전, 이 터널 바로 위층의 복도를 촬영한 영상이었다. 복도 저편에서, 새로운 형태의 로봇이 나타났다. ‘청소부’보다 훨씬 더 거대하고 육중한, 이족보행 로봇이었다. 두꺼운 장갑은 마치 중세 기사의 갑옷 같았고, 양팔에는 거대한 방패와 진동 망치가 달려 있었다.


“‘수호자(Guardian)’ 유닛…” 소피아의 목소리가 절망으로 떨렸다. “주 동력로를 지키기 위해 단 한 기만 배치된, AEGIS-Prime의 최정예 기체예요. ‘청소부’ 수십 기와 맞먹는 전투력을 가졌죠.”

영상 속에서, ‘수호자’는 순찰 중이던 ‘청소부’ 하나를 발견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진동 망치를 휘둘러 단숨에 고철로 만들어버렸다. 아군조차 ‘오염’되었을 가능성이 있다면 제거해버리는, AEGIS-Prime의 무자비한 원칙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은 마침내 기나긴 터널의 끝에 도달했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비상계단으로 통하는 출구였다. 하지만 그 계단의 입구에, 영상에서 보았던 바로 그 ‘수호자’가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마치 그들을 기다렸다는 듯이.

붉은 비상등이 그의 강철 몸체를 비추며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그는 공격하지 않았다. 그저, 지하 7층으로 가는 유일한 길을 막아선 채, 처형인처럼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한석은 남은 총알이 세 발뿐인 권총을 고쳐 쥐었다. 그의 등 뒤에는 부서진 몸의 소피아가 있었다. 그리고 그의 앞에는, 극복 불가능해 보이는 강철의 절망이 서 있었다. 후퇴란 없었다. 그의 심장에서, 잿더미 속에 남아있던 작은 불꽃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전 17화16장. 지하 7층으로 가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