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책. 언덕 위에는 뷔르템베르크 왕족의 여름 별장이 허름하게 방치되어 있다. 가끔씩 유모차를 밀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이 공원을 가로질러 갔다. 작은 교회가 보이는 벤치에 앉아 눈을 감았다. 빛은 점점 커지고 강해지다가 어느 순간 다시 희미해졌다.
서류 심사를 통과했다는 연락을 받았다. 아마 편지는 내일쯤 도착할 것 같다. 실기 시험은 원래 일정대로 13일 오전이다. S가 과제를 비롯해서 준비할 몇 가지 것들에 대해 조언을 해주었다.
죽음이라니 너무 급작스러웠다. 내가 죽은 삼촌을 위해 지금 할 수 있는 건 여기다 몇 자 적는 것뿐이다. 그러나 이걸 추도문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 같다.
우리는 서로 잘 알지 못했다. 그는 피하고 싶은 부류였다. 인간애가 부족했던 나는 어렸을 때부터 가족이라는 단어의 범위를 아주 좁고 협소한 것으로 축소시켰기 때문에 그는 나에게 남과 같았다. 내가 아빠였다면 속으로 나를 미워했을 것이다. 오늘 동생의 장례식에서 그는 많이 울었다. 팔에 난 상처를 통해 균이 순식간에 폐로 침투한 것이라고 했다. 자살보다도 비현실적인 죽음이다. 삼촌에게는 언제나 문제가 있었다. 신념을 위해 그는 큰 대가를 지불했고 어린 나이에 이미 그가 지니고 있던 아름다움을 잃었다. 아빠는 죽어 누워 있는 동생을 발견한 직후 정신을 다잡고 주변을 정리하고 모든 일들을 처리했다. 그리고 그는 장례식장에서 울었다.
삼촌은 나에게 사이먼 앤 가펑클 카세트테이프와 책 몇 권을 준 적이 있다. 우습게도 내 기억에 남아 있는 건 이것들뿐이다. 그의 손은 언제나 굳은 고목처럼 딱딱했다. 신경 질환으로 마비된 그 손을 내가 마지막으로 잡았던 건 일 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에 대한 나의 기억은 이 몇 가지뿐이다. 의미 없는 몇 개의 선물들. 딱딱한 손. 안 좋은 기억들은 전부 사라졌고 점점 더 사라질 것이다. 엄마는 그에게 미안함뿐이라고 했다. 죽음은 모두를 미안하게 만든다. 그는 더 이상 없다고 쓰면서 이 문장은 어딘가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삼촌이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가 여기서 찾지 못했던 것들을 다른 곳에서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 홀로 서서 나아가는 자유로운 모습으로. 이것이 내가 그에 대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쓴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