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독일어를 가르쳐준 빛나 선생님이 17일 J가 있는 바이마르로 오기 때문에 기분 전환용 여행도 할 겸 그곳에서 다 같이 만나기로 했다. L도 베를린에서 온다. J는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4월에 시작하는 어학 강좌를 위해 혼자 공부하고 있다.
독일어를 배우면서 친구를 사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J는 나와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지만 묘하게 통하는 부분이 있다. 그는 예나에서 철학을 공부할 생각이다. 학원에서 수업을 들을 때 그는 항상 맨 뒷자리에서 짧은 포마드 머리에 가죽점퍼를 걸친 채로 다리를 꼬고 있었기 때문에 선생님들은 그를 제임스 딘이라고 불렀다. 그는 나보다 한 달 정도 일찍 독일에 도착했고 그 사실은 나에게 힘이 됐다. 우리는 어쨌든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얘기했던 것처럼 꾸준히 연락을 하고 있다. 그리고 빛나 선생님 덕분에 나는 독일어를 좋아하게 됐다. 유학 준비를 막 시작하면서 알게 된 이 사람들을 독일에서 다시 만나면 어떤 기분이 들지 상상이 되지 않는다.
날씨가 계속 화창했고 잠시 미술관에 들렀다가 공원을 산책했다. 시간은 평소보다 느리게 흐르는 듯했다. 저녁에는 빨래를 하고 이사를 준비했다.
거의 방전된 상태로 있다. 산책을 했지만 실패했다. 구토를 다 읽었다. 결론부터 쓰자면 나는 로캉탱보다는 안니에 가깝다. 완벽한 순간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우리가 존재에 봉헌할 수 있는 그런 순간에 비로소 존재는 어떤 의미를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그러나 설령 그런 순간이 온다 해도 우리는 그것을 그저 지나쳐 보내야만 할 것이다. 파스칼은 습관을 제2의 천성이라고 썼던 것 같다. 이 천성이 유일한 존재 방식이라면 우리는 모두 죽음을 선택해야 마땅하다. 안니는 연극에 뛰어들었지만 실패했다. 그 이후에 남아 있는 것은 로캉탱이 정당하게 묘사했듯 우리 몸과 사방의 모든 구석에 들러붙어 흘러내리는 현존재다. 생각을 멈출 수 없다는 사실은 곧 탈출구가 없음을 의미한다. 그곳에서 안니는 돌진했고 로캉탱은 기다렸다. 쓴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동안의 나의 의심과 불편함이 모두 응집된 것을 보았고 그것은 폭로된 것처럼 느껴졌다. 있기를 바라는 것, 이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의 외부로 존재를 내쫓는 일, 순간순간에서 지방을 빼내는 일, 순간순간을 쥐어짜서 그것들을 말리고, 나를 정화시키고, 나를 견고하게 만들고,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색소폰 곡조의 맑고 정확한 소리를 내게 하는 일. 줄곧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던 것은 로캉탱이 롤르봉의 두 번째 죽음 속에서 직감했던 바로 그것이다. 이야기는 정말로 사실의 반대 방향으로 향한다. 순간순간은 되는대로 쌓이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의 결말이 각 순간들을 끌어당겨 붙잡고, 각 순간은 그보다 앞서는 순간을 다시 잡아당기는 것이다. 우리는 그때 미래가 아직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잊고 있다. 실제로 나는 아무런 선택도 하고 있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이유일까? 선택들을 삽입하고 치장하기 위해서? 로캉탱의 일기 첫 쪽에는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다. ‘아무것도 아닌 것을 신기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그것이 가능하다면 순간과 순간이 연결되는 모험 역시 가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