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는 하이데거의 존재론을 강화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극복하려 했다. 이야기는 삶에로의 도취라고 써야 할 것 같다. 전체를 포괄하는 것 ─ 하나의 거대한 눈으로서 그것은 공연한 사물들을 의식의 흐름대로 재배열하고 그것들에 새로운 모양을 준다. 마치 조각가와 작품의 관계처럼. 조각을 통해 작품이 아닌 조각가가 완성된다. 로캉탱에게 중요했던 문제는 과연 그 모양이 진실된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안니는 완벽한 형상에 대한 믿음을 좌절당했고 동시에 삶이 그녀로부터 빠져나가버렸다. 우리는 어디에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관념들은 겉돌고 있고 그것과 유희하는 모든 비극적인 것을 니체는 예술이라고 불렀다. 로캉탱은 과거는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비참하게 말했지만 존재가 존재하고 있다는 바로 그 사실과 다름 아니라면 과거 역시 그 문장 속 어딘가에 들어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이야기이다.
금세 현재는 사라지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고 말한 것은 루크레티우스였다. 그러나 그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다. 그대의 생명이 완수된 다음, 모두가 그대를 뒤따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