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s passiert einem Denken, wenn es in eine andere Sprache gerät? Aber darüber würde ich nichts zu sagen haben.
어떤 예술론.
책상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파악되는 방식은 오로지 나의 존재를 통해서 뿐이므로 책상의 본질과 직접적으로 관계하는 듯 여겨지는 형이상학적 믿음은 거짓이다. 나의 존재는 말하자면 책상을 감싸고 있다(내가 내 몸과 시야 안에 갇혀 있듯이). 책상의 형상과 속성들은 (내가 책상을 바라보고 있는, 혹은 그 위에 손을 얹고 있는) 지금 이 순간 나의 내부와 동성분이다. 예정된 일치로서의 예술론.
그 투영들은 무한한 노력과 수없이 실패한 실험들에 따라 생존력을 갖는다. 예술가는 단지 여기저기에 이를 뿐이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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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하나의 목적을 가정해보자. 예를 들어 책을 쓰는 것. 그렇다면 우리는 그다음 질문을 할 수 있다. 왜 책을 쓰려고 하는가? 누군가 읽히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왜 읽히려 하는가? 그는 자신의 사유를 전달하기 위해서라고 대답한다. 우리는 다시 묻는다… 이것은 영원히 계속될 수 있다. 하나의, 혹은 무한개의 목적이 있다는 사실과 정당성의 문제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존재의 목적을 묻는 질문에 진리에의 도달이라고 대답한다면 우리는 언젠가 이와 같이 말하게 될 것이다. ‘자, 우리는 드디어 절대 진리를 알게 되었다. 그런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하지?’ 이것은 우문우답이다. 우리는 존재의 목적을 묻거나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위한 무한한 목적들의 연결 고리를 상상할 수 있다면, 이미 존재는 그 모든 목적들의 합집합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진부하게도, 하지만 응당 그렇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아마도 존재의 목적은 곧 존재라고 말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이러니컬하게도 이것은 완전한 반허무주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