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8 수

by 홍석범

로고스는 세계 자체다.






2015. 8. 8 a



259. 인식하는 자의 건축 ─ 언젠가, 아마도 곧 우리는 특히 우리의 대도시에 결여되어 있는 것에 대한 통찰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깊은 성찰에 잠길 수 있는 조용하고 넓게 펼쳐진 장소, 날씨가 좋건 나쁘건 거닐 수 있도록 높은 천장과 길게 뻗은 회랑이 있는 장소, 마차의 소음이나 외침이 들리지 않고 세련된 범절이 성직자에게도 큰 소리로 기도하는 것을 금하는 장소, 전체적으로 성찰과 이탈의 숭고함을 표현하고 있는 건축과 시설 말이다. 깊은 성찰을 교회가 독점하던 시대, 사색적 삶이 종교적 삶이었던 시대는 지나갔다. 교회가 지어 올린 모든 것은 바로 그러한 사상을 표현하고 있다. 이 종교적 건축물들이 교회적 특징을 벗어버린다고 할지라도, 이것들에서 어떻게 만족감을 얻을 수 있을지 나는 알지 못한다. 신의 집이자 초월적인 세계와 소통하는 화려한 장소인 이 건축물들은 매우 열정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언어로 말을 건네고 있기 때문에, 우리 무신론자들이 이곳에서 우리의 사상을 생각하기에는 부적합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과 식물들에 맡겨, 이 홀들과 정원들을 거닐며 우리 자신 안으로 산책하기를 원한다.


Shakuna Vimana를 위한 메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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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바그너와 결별한 후 19세기의, 즉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철학적 염세주의를 디오니소스적인 것으로 이해했던 것은 그의 실수였다고 썼다.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가 삶의 지나친 충만성에서 비롯하는 반면 쇼펜하우어와 바그너의 경우 그것은 전혀 반대 방향, 즉 삶의 궁핍으로 인해 고뇌하는 자들이 요구하는 이중의 상태(휴식, 고요, 잠잠한 바다와 자신으로부터의 구원 - 도취, 경련, 마취, 광기)에 상응하는 것으로 니체는 이 염세주의를 낭만 염세주의라고 부른다. 디오니소스적 염세주의는 비극이라는 가장 고귀한 형태의 예술과 철학이 투쟁하는 삶에 봉사한다는 측면에서 본질적인 낭만주의이다. 아마도 이 차이는 그가 19세기의 염세주의를 일찍이 고전적이라 명명했던 사실에 이미 함축되어 있던 것인지 모른다. 이를테면 하이네는 고전적인 예술을 한정적인 것을 묘사하는 것, 낭만적인 예술을 무한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2015. 8. 8 b



입추. 휴일. 크리스토퍼 왈츠의 영화.


불볕더위 도중 갑자기 뇌우 경보가 발령됐다. 사방에서 회오리바람이 일었고 활주로는 불가사의한 힘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구름이 요동치고 나무들이 세차게 흔들렸다. 낙뢰가 떨어질까 봐 두려워하는 원숭이처럼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주기장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순간적으로 하늘이 깨지듯이 열리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점점 더 광포해지는 바람과 스멀스멀 올라오는 축축한 대지의 냄새는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두 시간 동안 멈추지 않고 소나기가 내렸다. 세척하고 정결하게 만드는 엄청난 힘이었다. 비가 그친 뒤 자전거를 끌고 활주로로 나갔다. 산등성이 위로 펼쳐진 안개는 멀어지면서 서서히 투명해졌다. 검은 바다 위에서 노를 젓는 기분으로 앞으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늦은 저녁 얼굴에 부딪히는 차가운 공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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