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18 토

by 홍석범

바젤 II


바이엘러로 걸어 내려가는 길. 높고 긴 담은 도로변을 차단하고 있고 입구를 통과하면 내밀한 정경이 펼쳐진다. 낡아진 지붕은 뻗어 나와 건물과 바로 붙은 연못 위까지 덮고 있다. 지붕 구조의 흰 페인트칠이 벗겨졌고 창에는 가리개가 내려져 있어 기대했던 만큼 첫인상이 투명해 보이지는 않았다. 작은 정원과 연못을 지나 측면으로 들어갔다. 결정이 큰 붉은색 석재는 파타고니아에서 들여온 화성암이다. 지붕에는 젖빛 유리를 사용했다. 반사광이 4중으로 투과되기 때문에 실내는 그렇게 밝지 않았다. 큰 흑백 사진 속에서 베이컨과 자코메티가 마주 보고 있다.


방의 중간에 자코메티의 조각들이 자유롭게 서 있고 벽에는 베이컨의 그림들이 크고 신비한 카드들처럼 걸려 있다. 그가 거의 언제나 같은 크기의 큰 캔버스에 그렸다는 사실, 그리고 그 그림들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걸려 있는 모습은 설명하기 힘든 일종의 웅장함을 불러일으켰다. 베이컨이 그린 형체들은 내속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어떤 고통스러운 생성, 일종의 몸부림처럼 보인다. 외부 세계로 이어지는 살이 사라진 느낌이고 형체들은 안감으로밖에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행성처럼 한가운데에 홀로 떠 있다. 반대로 자코메티의 늘여지고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몸들은 둥글둥글하고 뚜렷한 경계가 사라진 베이컨의 형체들과 묘한 대조를 이룬다. 길고 앙상한 인간은 한곳을 주시하거나 한곳을 향해 나아간다. 견뎌내는 것과 살아내는 것의 고고함 : 그 일관성은 나를 겸허하게 만든다.


서쪽 창밖으로 옥수수밭이 보인다. 아마 그 뒤로는 비제강이 흐르고 있었을 것이다. 바이엘러가 모든 예술품을 한 층에 전시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긴 직사각형 모양이 된 건물은 담과 옥수수밭 사이에 몸을 낮게 숨긴 채 앉아 있다. 옥수수밭과 미술관 사이에는 좁은 돌담길이 있고 간혹 자전거를 타고 그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머리가 보일 듯 말 듯하다. 평화롭고 조용한 분위기.






2015. 8. 18 화



기다림 속에 있을 때 시간은 흐르고 있지 않다고 카스토르프는 말한다. 가끔 이 노트의 작은 사각형이 나에게 전부라고 느낀다.


여기에 O의 어떤 모습을 포착해두려 했지만 놓쳐버렸다. 지금 머릿속에 남아 있는 건 목소리뿐이다. 삶과 유머와 어떤 기분 좋은 색깔들로 차 있는 목소리.



문학과 예술 ─ 시와 조각에 대하여


어떤 풍경을 글로 묘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과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같은 원천에서 오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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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 어떻게 바로 직전까지도 그토록 사실적이던 세계 전체가 눈을 뜨는 순간 흔적도 남기지 않고 해체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눈을 뜨는 그 찰나의 순간이 도대체 얼만큼의 시간인지 알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울프는 꽃잎이 떨어지는 한 순간 속에 삶 전체가 들어 있다고 했다. 어쩌면 이 두 눈 바로 뒤편에 무한소의 어떤 지점이 있고, 사라진 꿈들은 계속 바닥이 깊어지는 우물 밑으로 영원히 침잠하는 돌들처럼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나는 곧 그 가능성의 세계들이 나에게 열려 있었다는 사실을 완전히 망각한다.



3G를 바라보며 광장 같은 곳에 앉아 있었다. 밑으로 내려가는 넓은 계단이 보였다. 내 옆에는 이상한 동물이 있었는데 그 등껍질은 여러 겹을 형성하면서 왕관의 첨점들처럼 뾰족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을 만지는 것이 두려웠지만 곧 조심스럽게 그 볼록한 등을 쓰다듬었다(놀랍게도 그것은 부드러웠다). 내 손이 닿자 갑자기 등껍질이 겹겹이 모아지기 시작했고 그 동물은 공벌레처럼 동그랗게 몸을 말았다. 계속 쓰다듬자 그 동물은 점점 작아졌고 나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다시 쓰다듬으려 했지만 어느새 그 동물은 뾰족한 꼭짓점들이 무한하게 반복되는 이차원적인 프렉탈의 형체를 가진 괴상한 곤충으로 변해 있었다. 프렉탈은 천천히 회전하면서 자기 내부에서 점점 더 많아졌고 나는 그 프렉탈이 그 곤충의 뱃가죽에 새겨진 문양인지, 아니면 그 프렉탈이 바로 곤충 자체인지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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