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세의 코르뷔지에는 동방여행의 끝에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이십 대고 더 이상 질문에 대답할 수 없다.”
나는 아마 다음과 같이 써야 할 것이다. “나는 이제 삼십 대고 질문을 던져야만 한다.”
새벽
보르헤스의 단편 중 자이르는 ‘명백한’이란 뜻을 가진 신의 아흔아홉 개의 이름 중 하나다. 자이르는 시인이 되고자 하는 건축가가 얻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이름이기도 하다. 코르뷔지에는 아토스 산의 기하학적 조형 앞에서 힘들의 표현을 목격했다. 힘은 언제나 명백하다.
코르뷔지에는 20세의 나이에 첫 주택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미스 역시 릴 주택을 설계했을 때가 21였다. 그들은 이미 건축에 대해 발언할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반면 나에게 건축은 아직까지도 하나의 이상향으로서만 있다. 그것은 몇 개의 상징적인 단어들일 뿐이다.
큰 걸음으로 멀리 나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조금 더디게, 매 발자국마다 최대한 힘을 실으며 나아간다 해도 문제 될 것은 없다. 소로우는 오두막집 책상 위에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를 여름 내내 올려 두었다. 그러나 그는 집을 마저 짓고 콩밭을 돌보느라 이따금씩 밖에는 책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자기의 또래들과 보조를 맞추지 않는다면, 그것은 아마 그가 그들과는 다른 고수의 북소리를 듣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박자가 어떻든,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나는 봄에서 여름으로의 이행 중에 있다. 그리고 여름은 충분히 길고 충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