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적 관념, 문학적 관념, 사랑의 변증법, 또한 빛의 분절들, 음향과 촉각의 전시 양식들은 우리에게 말을 건네며, 그들 나름의 논리, 일관성, 조합, 부합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도 역시 현상들은 미지의 힘과 법칙들을 가리는 가면이다. 마치 힘과 법칙들이 은신해 있는 비밀, 문학적 표현이 힘과 법칙들을 끌어내는 장소인 이 비밀이 힘과 법칙들 자신의 존재 양식 이기라도 한듯하다. 이러한 진실들은 단지 사람들이 발견할 줄 몰랐기에 사실fait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물리적 실재처럼, 그러나 우리가 어느 날엔가 분명히 볼 수 있을 그러한 사실처럼 은폐되어 있지 않다. 여기서는 반대로 장막이 없으면 보이는 것도 없다. 지성의 관념이나 마찬가지인 소악절, 빛의 개념은 그 발현들로 소진되지 않으며 우리들에게 관념들로서 주어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신체적 경험에서 단지 관념들을 생각할 기회를 얻는 것이 아니다. 관념들은 감각적인 것의 뒤에 또는 감각적인 것의 심부에 투명하게 있다는 바로 그 사실로부터 자신들의 권위를, 매혹적이고 파괴 불가능한 힘을 보유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관념에 즉각 도달하고자, 그것의 윤곽을 어림잡고자, 또는 베일을 벗겨서 그것을 보고자 할 때마다 우리는 이러한 시도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을, 그리고 관념들은 우리가 가까이 접근할수록 멀어져 감을 느낀다. 명확화는 우리에게 관념 자체를 주지 못한다. 명확화는 관념의 제2번안, 관념을 좀 더 쉽게 조작할 수 있는 관념의 편집물에 불과하다. 스완은 소악절을 기보법의 표식들에 의거하여 위치시킬 수 있고, 소악절의 본질 내지 의미를 만들고 있는 ‘움츠리고 여린 부드러움’이 소악절을 구성하는 다섯 음표 사이의 미세한 간격, 그리고 다섯 음 가운데 계속 반복되는 두 음과 관계가 있음을 파악한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기호들과 의미를 생각하는 순간 더 이상 소악절을 그 자체가 아닌 다만 ‘지능의 편의를 위해 그가 지각한 신비스러운 존재자에 대입시킨 단순한 가치들’만을 가지게 된다. 이런 유의 관념들에게는 ‘어둠의 베일을’ 쓰는 것이, ‘가면을 쓰고’ 나타나는 것이 더없이 중요하다. … 발레리가 말한 바 있는 우유의 은밀한 검은 속내에 우리는 우유의 백색을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 것처럼, 빛의 관념이나 음악의 관념은 빛들과 음향들의 밑에 깔린 속감이자 그 다른 면 또는 그 깊이이다. 빛 관념의 살 조직, 음 관념의 살 조직은 우리에게 살을 전혀 가지지 않은 살 조직을 제시한다. (VI, 214-215)
주말이었지만 아침 7시 45분부터 밤 10시까지 비행이 있었다. 7월 15일부터 쓴 이 일기장도 이제 몇 장 남지 않았다.
모든 정당화의 경우에는 나폴레옹적인 사고가 들어 있다.
건축은 어디로 가는가? 이 질문은 물론 건축의 미래에 대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이것을 ‘건축은 어디서 오는가?’의 반대로 말하고 있다. 며칠 전 밤 격납고들 사이를 산책하던 중 문득 그 콘크리트 덩어리들이 대단히 비현실적이고 비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것들은 대체 어디서 온 것인가? 타협하지 않는 모서리 뒤로 나무들의 그림자가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숲은 검고 유기적인 하나의 윤곽으로 합쳐진 상태였다. 벽 끝의 선은 유난히 밝은 회백색으로 빛났는데, 그 꼭대기에는 고딕 성당의 조각상처럼 작은 홈통이 무감각하게 튀어나와 있었다. 그것들은 전혀 미지의 것처럼 보였고 약간 섬뜩하게 느껴졌다.
최초의 건축은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닌 신을 위한 것이었다. 건축이 표방했던 것은 정신과 지배력, 즉 일종의 힘의 과시였다. ‘황량하고 야만적인 풍경 속에서도 신전들은 완전무결한 구조를 자랑한다. 강력한 정신의 승리다…’
건축이 어디로 가는가 질문하는 것은, 그것이 건축은 어디서 오는가를 반대로 말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역사적인 연구이다. 이것은 아마도 K와의 논쟁, 즉 왜와 어떻게의 경계선상에 존재하는 사유이기도 하다. 건축에 이론Theorie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도 오로지 이 질문만이 건축의 이론에 해당할 것이다. ‘Theorie’라는 이름은 그리스어 동사 테오레인θεωρεῖν에서 유래한다. 테오레인θεωρεῖν은 테아θέα와 호라오ὁράω라는 두 가지 어근이 결합되어 생긴 것이다. ‘Theater’에 그 흔적이 남아 있듯 테아는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스스로를 나타내 보이는 그런 시선이자 보임새, 즉 그 안에서 어떤 것이 스스로를 나타내는 그런 모습이다. 플라톤은 그 안에서 현존하는 것이 자신의 본질을 가리켜 보이는 이러한 보임새를 에이도스εἶδος라고 불렀는데, 이러한 보임새를 보고 있었음(εἰδέναι)이 곧 앎이다. 테오레인에서의 두 번째 어근인 호라오는 어떤 것을 바라봄, 어떤 것을 보는 이의 시야 속으로 받아들임, 즉 그것을 주시함을 뜻한다. 테오레인은 그 안에서 현존하는 것이 나타나는 그런 시선을 바라보고, 그러한 봄을 통해서 현존하는 것을 보면서 시선 가까이에 머무르고 있음이기 때문에 건축에서 이론은 필연적으로 실행으로 이어진다.
실행이 아닌 디자인은 없다. 이 말은 반대로 모든 디자인은 이론이 되어야 함을 뜻한다.
나는 지금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나는 이 설계가 선언적인 것으로 끝나기를 바라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지어지는 것을 목표했다…
지어가면서 질문에 다가갈 수 있다. 이 모든 과정은 하나의 시야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다. 그 시야 속에서, 말하자면 나라는 인간은 오로지 그 시야 속에서만 하나의 위대한 가능성을 보고 있다.
‘미래의 일로 불안해하지 말라. 그리로 가야 한다면, 네가 현재의 일에 쓰고 있는 바로 그 이성으로 무장하고 그리고 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아우렐리우스의 말에 한 가지 덧붙일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의지이다. 우리는 이성과 의지로 무장한다. 그리고 이것은 진실로 나폴레옹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