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에 대하여
이 글은 신원혜 교수님의 부탁으로 공간 이름 짓기에 대해 고민하면서 메모해둔 것들을 정리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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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제는 특정 공간을 위한 이름을 짓는 것이다. 교수님은 이것을 이름하는 언어Namesprache라고 표현하셨다. 내가 부탁받은 것은 이 과제를 위한 일종의 본보기를 제시하는 것으로, 이번에 설계했던 다음 사진 속 공간에 이름을 붙이는 것이었다. 일주일 정도 고민한 끝에 내가 생각해낸 이름은 음영간陰影間이다.
천장의 곡면은 자연광을 받아 갤러리 벽 하부로 반사시킨다. 내부 표면의 빛 퍼짐이 설계의 중요한 주제였고 결과적으로는 빛을 주고받는 두 표면 사이에 일종의 스토아인 긴 공간이 만들어졌다. ‘음영’은 사전적으로 색조나 느낌 등의 미묘한 차이에 의해 드러나는 깊이와 정취를 뜻한다. 빛이 없다면 음영이 무엇인지 정의할 수 없을 것이다. 한자는 ‘그늘, 응달, 해그림자, 세월, 흐르는 시간, 어둠, 가만히, 희미하다’ 등을 뜻하는 그늘:음陰과 ‘그림자, 환상, 형상, 햇살, 빛’ 등을 뜻하는 그림자:영影을 쓴다. ‘그늘:음’은 또한 ‘침묵할:암’이기도 해서 ‘침묵하다, 묻다’의 뜻 역시 가지고 있다. 여기에 ‘공간’에서의 사이:간間을 붙여 ‘음영간’이라고 했다. 풀어쓰면 ‘음영의 사이’, ‘음영이 섞이다’ 정도 될 것 같다. 그러나 ‘사이:간’에 ‘비밀히’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을 감안하면 이 이름은 어쩌면 빛 자체에까지도 해당하는 어떤 더욱 신비롭고 붙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지시하는 것이 될지 모른다.
공간의 척도로서의 시간, 시간의 척도로서의 공간을 생각하면, 바로 그 공간을 부르는 이름/이름하는 언어는 자연스럽게 명사가 아닌 술어가 되어야 할 것이다. 보르헤스가 묘사하는 틀뢴의 언어에는 아예 명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그 나라의 남부에서는 명사가 동사로 대체되고, 사람들은 ‘달moon이 떴다’고 말하는 대신에 ‘달했다mooned’라고 말한다. 북부에서는 명사가 형용사로 대체되어 ‘달’은 ‘어둠 속의 둥글고 투명하게 밝음’이라 불린다. 명사가 없다는 것은 곧 실체, 즉 사물의 동일성을 부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그 세계에서는 사물이 존재하는 대신에 사건이 생성될 것이며, 그 사건은 일회적이어서 매번 고유할 것이다. 여기서 틀뢴은 버클리류의 완전한 관념론의 세계다. 버클리에 따르면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물이 지각될 때의 특유한 존재방식을 부르는 이름으로 후설은 다름 아닌 ‘음영’을 술어적으로 사용했다.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바라볼 때, 보는 거리와 각도, 보고 있는 사람의 몸가짐이나 주의하는 방식 등에 의해 나무가 보이는 모양은 다양하게 변화한다. 그러나 보이는 모양이 연속적으로 변화하고 다양하다 하더라도 나무 그 자체나 그 나무의 형태와 색깔 등은 언제나 동일한 것으로서 현출한다. 바로 이 사물의 존재방식을 후설은 사물이 ‘음영한다’고 표현했다. 이런 의미에서 ‘음영간’은 ‘음영함의 동안’, ‘음영함의 비밀’이 될 수도 있겠다.
공간을 위한 이름을 짓기 위해서는 먼저 공간을 사유해야만 하는데, 이름 짓기의 과정─이름하는 언어─은 바로 이 사유이다. 호크니의 누이는 브리들링턴의 한 바닷가 옆에서 호크니에게 공간이 신일지도 모른다는 신비로운 말을 한 적이 있다. 언어학적 측면에서 볼 때 헬라스인들은 ‘신θεός’이란 말을 술어적으로 사유했다. 우리가 기독교적으로 ‘신은 선하다’고 말할 때, 신은 초월적 존재자로서의 ‘존재’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며 우리는 신에 관한 질적인 판단을 내린다. 이 히브리인들의 언어에서 신은 주어의 자리에 위치한다. 그러나 반대로 헬라스인들은 ‘사랑은 신이다’, ‘아름다움은 신이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표현은 신비로운 신성의 존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랑과 아름다움에 관한 무언가를 말하는 것이다. 그들에게서 신이란 말은 죽어야만 하는 것─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범주를 벗어난 ‘무엇’을 나타낸다. 그들은 신을 죽지 않는 존재라는 뜻을 가진 ‘αθάνατος’라고 불렀고 자신들에게 즐거움이나 두려움을 주는 것들에 대해 감격한다거나 혹은 경외의 마음을 갖게 되면 그때마다 ‘이것은 신이다’, ‘저것은 신이다’라고 말했다. 세계에 작용하고 있는 지배력이나 힘, 즉 우리와 더불어 태어나지 않았으며, 우리들이 사라지고 난 뒤에도 존속하게 될 그러한 지배력이나 힘은 그 어떤 것이라도 이처럼 하나의 신으로 불릴 수 있었고, 실제로 그러한 대부분의 것들이 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