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자체를 봄, 보는 자의 보이지 않는 자리, 존재의 변증법
“만약 우리가 살이 최후의 개념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면, …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나를 만드는 것인 이 원환, 가시적인 것의 가시적인 것으로의 이 감김은 나의 것뿐 아니라 다른 몸들을 가로지르고 그것들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있다.”(VI, 202)
·
스스로의 감김enroulement을 벗어나는 감각은 없다. 내가 감각한다는 것은 동시에 감각된다는 사실을 함축하는 것이고(보이는 것으로서의 봄, 만져지는 것으로서의 만짐) 이는 감각하는 자는 감각하는 것들 사이에 속해 있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감각함은 어떤 통로의 가역적인 열림이다. 감각은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는 것의 중간에 위치하며,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는 것은 각각 그것에로의 접속[유기적 결합]에 의해 연결된다. 이 접속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메를로-퐁티의 살의 개념이다.
여기서 감각은 주체와 대상의 구분에 선행하는 “존재 이전의 존재”다. “빨강의 감각Rotempfindung은 감각된 빨강Rotempfundene의 일부를 이룬다─이것은 일치가 아니라 열개, 스스로를 열개로서 인식하는 열개이다.”(VI, 384) 아리스토텔레스는 감각함을 그 잠재적인 본질에 있어서 대립하는 주체와 대상, 즉 감각하는 것과 감각적인 것의 현실태적 일치로 이해했다. 기관과 감각은 막연하게 존재할 뿐이다가 감각함이라는 체험을 통해 각각의 본질을 비로소 실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메를로-퐁티에게 감각하는 것과 감각적인 것은 감각의 덩어리(대문자로 시작하는 Sensible)라는 동일한 근원을 갖기 때문에 둘의 본질에는 구분이 없다. 또한 이 감각의 덩어리─그 자체로 감각적인 것으로서의 감각─는 주체의 체험을 넘어서 존재하기 때문에 감각함의 체험이 감각적인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감각 그 자체가 감각함을 가능하게 한다고 이해해야 한다. 이 감각의 덩어리는 내부적으로 분열하여 다양한 감각함을 통해 표현되며, 마치 형태들이 있는 곳에 언제나 공존하는 바탕처럼 실제적 감각함의 체험 이전과 이후에서 무한하게 머문다. 메를로-퐁티는 이것을 ‘…이 있다(il y a)’로 표현하는데, 이 감각 세계의 존재가 바로 살의 존재다.
“살의 특권적 변이로서의 몸은 그 자체로는 사물도 결합 조직도 아니며 대자로서 감각적인 것(sensible pour soi)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중간에 있는 몸이 감각 작용의 주재소인 색깔들과 표면들의 어떤 전체, 즉 전형적 감각체(sensible exemplaire)라는 것이다. 전형적 감각체로서의 몸은 사물들의 조직 가운데 사로잡힘과 동시에 이 조직을 모두 자신에게로 끌어당겨 체내화한다. 그리고 사물들 위로 자신을 다시 닫으며 이 체내화 운동을 통해 포개지지 못하는 동일성, 모순 없는 차이, 안과 밖의 편차를 전달한다. *우리는 사물들 자체를 지각한다고, 우리는 자신을 사유하는 세계라고─또는 세계는 우리 살의 심부에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몸은 자신의 개체발생에 의해 우리를 직접 사물에게 결합시킨다. 몸은 감각의 덩어리로부터 분리에 의해 태어났으며, 이 감각의 덩어리에게 몸은 감각하는 자로서 열려서 머문다. 사물들은 사물들과 동일한 세계에서 사물들과 공존하는 몸이 있을 경우 이러한 몸에게만 열려 있는 존재들인 것이다.”(VI, 194-195) 이것이 메를로-퐁티가 지각함의 명증성을 지각된 대상의 명증성과 일치시키는 이유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사물들 자체이고 그 외의 다른 것이 아니다.
이때 몸을 이루는 살의 존재는 끊임없이 생성의 과정에 있는 역동적인 존재다. 생성 중에 있다는 것은 충만한 존재가 아니라는 뜻이며 부정성을 함유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부정성은 존재에게 열려 있는 몸으로서의 우리의 자리, 즉 존재 가운데의 공백, 맹점punctum caecum을 통해 드러난다. 세계를 현시하기 위해 시각은 스스로 세계의 일부가 된다. 나는 무언가를 보기 위해서는 세계 속에 내가 있는 한 지점을 전제할 수밖에 없는데, 이 지점은 동시에 보는 나 자신을 내가 볼 수 없는 지점이기도 하다. 시각이 실행되는 바로 그 순간 이 눈멂에 의해 타격을 받지 않는 시각은 없다. 이 맹점은 보이는 것들 가운데 보는 자의 자리이자 스스로를 알지 못하는 탐험인 눈의 운동이다. 다시 말해, 맹점의 공백은 무無이나 사르트르가 긍정성으로서의 존재와 이분법적으로 구분한 절대적인 무가 아닌 감각적 존재 가운데에 있는 무로서의 무이다.
사르트르적 의식의 절대적인 부정성을 액면대로 취한다면 시각의 경험은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만일 존재가 완전히 즉자적으로 있다면 존재는 오직 동일성의 밤 가운데서만 그 자신일 터이며, 존재를 밤으로부터 끌어내는 나의 시선은 존재를 존재로서 파괴해버릴”(VI, 113) 것이기 때문이다. 이 난점을 극복하기 위해 사르트르는 시각을 무화로서 사유했지만 이러한 존재와 무의 분석론은 추상화일 뿐이어서 전前반성적인 존재를 도출해내지 못한다. 보는 자는 순수한 부정성이 아니며 보는 행위는 순수한 무화일 수 없다. “시선과 사물들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공조를 엿본다. 나는 존재를 더 이상 나의 시각에서 유래하는 부정적 특성들 밑에 있는 긍정성의 견고한 핵처럼 정의할 수 없다. 요컨대 만약 부정적 특성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다면 볼 것은 더 이상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며, 내가 그것들을 그 자신이 존재 속에 매몰되어 있는 대자에게로 귀속하도록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내가 비본질적 명칭들처럼 간주하도록 배웠던 부정들, 전망적 변형들, 가능성들을 나는 이제 존재에게─결국 깊이로 듬성듬성 배치되어 있으며, 자신을 드러냄과 동시에 감추고, 심연이며 충만이 아닌 존재에게─재통합해야 한다.”(VI, 115)
메를로-퐁티는 인간이 몸으로부터 탄생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성된 정신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며 단번에 보는 자로서의 자격을 획득하지 못한다. 인간은 일단 보이는 것으로 태어나 세계를 향해 열린 상태로 머문다. 보는 자로서의 존재는 그보다 앞서 보이는 것으로서의 몸이 열어놓은 이 공백의 자리에 수많은 길들이 교차하고 열리면서 전개된다. 이 살의 존재 안에서의 봄, 공백의 자리가 망각되지 않는 봄만이 진정한 봄이다. 메를로-퐁티에 의하면 사유, 즉 표상적 봄은 이 공백을 메워버리면서 가시성의 영역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관념의 영역으로 들어가기 때문에 정신의 눈에 의한 봄은 진정한 봄이라고 할 수 없다. 진정한 봄은 보이는 몸이 만들어내는 공백으로 인한 그 자신의 수동성을 언제나 함축하고 있는 봄이다. 세잔이 반복해서 생 빅투아르 산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보는 자가 함축하는 공백이 영원히 메워질 수 없는 공백이기 때문이다.
바로 이 공백이 보이는 것들의 차이화를 만들어낸다. 메를로-퐁티는 이 역동적인 살의 존재를 “차이화의 동일성”이라고 부르는데, 세잔이 그린 서로 다른 수많은 생 빅투아르 산의 그림들은 전부 생 빅투아르 산인 것이다. 클로드 르포르는 『눈과 정신』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화가의 작업은 비전과 가시적인 것의, 외관과 존재의 불가능한 공동 분배를 메를로-퐁티에게 납득시킨다. 그것은 그에게 끝마쳐질 수 없는 질문에 대한 증언을 전달하는데, 이는 한 작품에서 다른 작품으로 되던져지고, 어떤 해답에 이를 수는 없지만, 그럼에도 어떤 인식을 전달하는 것이며, 바로 그 가시적인 것에 대한 인식을 화폭에 도래하게 하는 행위에 의해서만 표현될 수 있는 독특한 속성을 갖는다.” 가시화된 생 빅투아르 산의 차이들은 진정한 생 빅투아르 산을 표현하고자 인간이 시도한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산이 인간의 몸의 공백을 통해 표현된 것이다. “숲속에서 나는 여러 차례 숲을 응시하는 것이 내가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어떤 날에는 나무들이 나를 응시하며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을 느꼈다… 나는 거기에 있다.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화가가 우주에 의해 관통되어야 하며 우주를 관통하기를 바라지 말아야 한다고 믿는다… 나는 내부적으로 잠기고 묻혀버리기를 기다린다. 아마도 나는 부상하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Georges Charbonnier, Le Monologue du peintre, 143-145)
메를로-퐁티가 말하는 맹점의 공백은 보는 자에게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뜻한다. 보이는 것 안에 스스로를 볼 수 없는 보는 자 자신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은 보이는 것 안에는 실제로 보는 자가 보지 못하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세계는 무한한 잠재성을 가지고 있으며,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제는 전체 상황의 이념화, 전체 상황을 어림잡은 표현, 우리가 말하는 것 이외에도 우리가 말하는 것을 퍼올리는 샘이 되는 무언의 경험을 함축하고 있는 표현이다. “우리는 말해진 것일 따름인 존재와 무가 서로에게 역행하여 작업하는 공통적 환경을 재발견해야 한다. 우리의 출발점은 존재는 존재하고 무는 존재하지 않는다가 아닐 것이고─존재만이 있다는 전체화 사유, 조감적 사유 역시 아닐 것이며─다만 존재가 있다, 세계가 있다, 어떤 것이 있다일 것이다. … 맨 먼저 있는 것, 그것은 무의 바탕 위에 있는 긍정적이고 충만한 존재가 아닌 외양[현상]들의 장이다. 나는 하나의 현상이 정정하는 진실일 다른 현상에 의해 대치되는 것은 세계가 존재하기 때문이고,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안다. 존재하기 위해 먼저 아무것도 아닌 것을 무화시킬 필요가 없는 하나의 세계가, 하나의 어떤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VI, 129-130)
존재 속에 매몰된 무를 기술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직관과 무의 부직관을 변증법으로 대치해야 한다. 변증법적 사유는 주고받는 역방향의 작용을 받아들이는 사유이기 때문이다. 좋은 변증법은 명제란 모두 이념화이며, 존재는 논리학이 믿었던 바대로 말해진 것들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다. 메를로-퐁티가 추구하는 존재의 변증법적 정의는 반성에 의한 분열 이전에서, 무엇인가가 지금 ‘있는(il y a)’ 곳에서 재발견되어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