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를로-퐁티, 지각적 신념과 반성
지각적 현전(지금 여기 있음)은 긍정이나 부정 이전의, 판단 이전의, 그 어떤 의견보다 더욱 오래된 우리 몸으로 세계를 점유하는 경험이요, 보는 것과 진짜(진실인 것)를 보는 것은 원칙적으로 같은 것이기 때문에 본다는 확신과 진실인 것을 본다는 확신 사이에서 선택할 필요도 없고 그 둘을 구분할 필요도 없이 우리 자신 전체에 의해 진리 한가운데에 있는 경험이다. 지각적 현전은 결국 앎이 아니라 신념이다.
지각적 신념을 고수하지 못한다고 하면, 나는 내 안으로 되돌아가서 내 안에서 진리가 머무는 곳을 탐색하는 일 말고는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나의 지각이 세계를 지각함이라고 한다면, 내가 나와 세계의 교제에서 내가 세계를 보아야 하는 근거들을 발견해야 하고, 나의 시각의 의미를 나의 시각에서 발견해야 하는 것은 자명한 일이 아닌가? 요컨대 나라고 하는 이 앎에게 세계가 자신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오직 앎에게 하나의 의미를 제공하면서뿐이며, 세계에 대한 사유 형태로서뿐이다. 우리가 탐구하는 세계의 비밀은 필연적으로 세계와 나의 접촉 가운데 들어 있어야 한다.
내가 지각적 신념이 야기하는 당혹스러움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세계에 대한 나의 경험과 이야기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이다. 지각적 신념과의 관계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의 사유와 사유 대상과의 관계, 코기토와 코기타툼의 관계 역시 우리와 세계의 교제 전체는 차치하고 그 핵심조차 담고 있지 못하는 것이 확실하다. 우리는 이 교제를 세계와의 좀 더 암묵적인 관계 가운데, 이 교제의 기초가 되고 있으며 반성적 회귀가 개입할 때면 언제나 이미 이루어져 있는 세계에의 배움 가운데 다시금 위치시켜야 하는 것도 확실하다. 우리는 반성적 노력이 이 교제─세계로의 열림─를 포착하려는 순간 그것을 놓칠 터이나, 동시에 우리가 그 일에 성공할 수 없는 이유들과 그럼에도 시도해볼 수 있는 방도를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반성은 오직 세계를 보기 위해서만, 세계가 우리에게 세계가 되기 위해 밟아온 길을 세계로부터 읽기 위해서만 세계에 대한 신념을 유보해야 하며, 세계 자체 속에서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각적 끈의 비밀을 찾아야 하고, 이 논리 이전의 끈을 말하기 위해서 단어들을 사용하되 단어들의 기존의 의의들에 부합시켜서 단어들을 사용해서는 아니 되며 … 세계를 사유할 전제적 가능성 쪽으로 거슬러 오를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세계를 향해 내려가야 하며 … 세계가 침묵 가운데서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을 말하게 해야 한다…
내가 세계와 타자들을 알기 위해 나 자신을 준거로 삼아서 반성이라는 방법을 취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먼저 내가 나의 외부에, 세계 속에, 타자들의 곁에 있었기 때문이며, 또한 이러한 경험이 매 순간 나의 반성을 형성시키기 때문이다. 그러한 것이 전체적인 상황이고, 철학이 설명해야 하는 상황이다. 철학이 반성에 포함된 정반대의 두 성질을 받아들일 때, 그리고 헤겔이 말했듯이 자기 내면으로 들어옴은 또한 자기로부터 나오는 것이 될 때 철학은 그와 같은 과제를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