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은폐로서의 건축 I

하이데거, 기술에 대한 물음 / 건축함 거주함 사유함

by 홍석범

우리가 원인(Ursache), 로마인들이 causa라 명명한 그것을 그리스인들은 다른 어떤 것에 책임을 지고 있다는 의미로서 아이티온이라 했다. 4원인설은 아리스토텔레스에게로 소급된다.


· 재료-휠레(질료인)

· 보임새-에이도스(형상인)

· 특정 영역에 국한해 사용되도록 한정하는 것; 그러나 이 끝과 함께 사물이 끝나버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거기서부터 그 사물은 그것이 제작된 후 존재할 바의 그것으로 존재하기 시작한다는 의미로서의 끝내는 것, 완성하는 것-텔로스(목적, 목표는 잘못된 번역)

· 위의 세 가지 방식들을 숙고(레게인, 로고스)하여 한군데에 모으는 제작자(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서는 능동인이라는 칭호를 가진 원인을 찾아볼 수 없다.)


위의 네 가지 원인은 한 사물이 그것으로서 앞에 마련되어 있다는 데에 책임이 있다. 책임이 있음의 네 가지 방식들은 어떤 것을 그곳에 놓아주어 그것이 그렇게 현존하도록 한다, 즉 그것의 완성된 출현을 야기시켜준다. 책임이 있음은 이러한 야기시킨다는 의미에서, 무엇을 있도록 함이다. 책임이 있음의 네 가지 방식들은 그 자리에 현존하는 것을 전면에 나타나게끔 내어놓음에 의해 단일하게 묶여 있다. 이 내어놓음이 무엇인지를 플라톤은 향연의 한 문장(205b)에서 말하고 있다 : 어떤 것을 그 자리에 없던 상태에서 그 자리에 있음으로 넘어가게 만드는 것을 야기시키는 모든 것은 포이에시스, 즉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이다.


퓌시스, 즉 스스로 안에서부터 솟아오름 역시 포이에시스다. 그뿐 아니라 퓌시스는 가장 높은 의미의 포이에시스다. 왜냐하면 퓌세이(자연적 양상)로 그 자리에 있는 것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는 돌출의 힘을 자기 자신 안에(엔 아우토)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예술적 또는 수공업적으로 밖으로 끌어내어져 앞에 내어놓인 것은 그 힘을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데에(엔 알로), 즉 제작자 속에 갖고 있다.


야기시켜 있도록 함에는,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에서 그때그때마다 출현하는 그것의 현존이 문제가 되고 있다. 다시 말해 은폐된 것이 비은폐의 상태로 나타나는 한에서만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 이 나타남으로서의 탈은폐를 그리스인들은 알레테이아라는 낱말로 표현했다. 로마인들은 그것을 “veritas”라고 번역했고, 우리는 그것을 “진리(Wahrheit)”라고 부른다.


앞에 내어놓음, 산출함은 그리스어로 틱토(to bring forth, of the earth bringing forth its fruits)이다. 이 동사의 어원인 tec에는 테크네, 즉 Technik이란 낱말이 속한다. 그리스인들에게 있어 이 단어는 단순히 예술이나 수공업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음, 즉 포이에시스에 속한다. 그것은 시적인 어떤 것이다. 서양 역운의 시작인 그리스에서 예술은 그 자체에 보존된 탈은폐의 최고도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 이 예술은 신들의 현존을 이끌어 냈으며, 신적인 역운과 인간의 역운 사이의 상호 대화를 빛나게 해주었다. 그리고 이 예술은 테크네라고만 일컬어졌다. 그것만이 유일한 다각적인 탈은폐였다. 예술은 기교적인 것에서 유래하지 않았다. 예술 작품들이 심미적으로 음미된 것도 아니다. 예술은 문화 창조의 부산물이 아니었다. 예술은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은 포이에시스에 속하는 것이었고, 이 “포이에시스”라는 이름을 나중에는 모든 미의 예술들을 관장하고 있는 탈은폐가, 즉 시가, 시적인 것이 자기 고유의 이름으로 간직하게 되었다. 시적인 것은 모든 예술에, 즉 본질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미에로 열어 보이는 모든 탈은폐 안에 삼투해 내재하고 있다.


테크네라는 낱말과 관련해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두 번째 것은 앞의 것보다 더 중요하다. 테크네라는 낱말은 옛날부터 플라톤 시대에 이르기까지 에피스테메라는 말과 같이 사용되어왔다. 이 두 낱말은 넓은 의미에서의 인식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인식은 해명하며 열어젖히는 힘이 있다. 해명하는 인식으로서의 인식은 일종의 탈은폐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한 독특한 고찰에서(니코마코스 윤리학 IV, c.3, c.4) 에피스테메테크네를 그것들이 무엇을 그리고 어떻게 탈은폐하고 있는가의 관점에서 구별한다. 테크네알레테우에인의 한 방식이다. 그것은 스스로 자신을 밖으로 끌어내어 앞에 내어놓지 못해서 아직 앞에 놓여 있지 않은 것, 그래서 금방 이렇게 저렇게 모양새를 바꾸어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을 탈은폐한다. 이렇게 사유되어야 할 테크네가 바로 건축술의 구조학 안에 은닉되어 있다. 그러나 건축하는 산출함의 본질은 건축술로부터도 또한 건축공학으로부터도 그리고 양자의 단순한 결합으로부터도 충분히 사유될 수 없다. 건축의 본질은 전혀 건축술적인 혹은 건축공학적인 것이 아니기에, 건축에 대한 본질적인 자각과 건축과의 결정적인 대결은 한편으로는 건축의 본질과 가깝게 관련되어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그런 어떤 영역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다. 그런 영역이 곧 예술이다. 건축의 본질에 대해 물음을 던지며 사유하면 할수록 예술의 본질이 더욱더 신비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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