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olumba Kunstmuseum

음악에 대하여

by 홍석범
Medusa Wallraf



이른 아침 클라우스 수사의 채플에 갔던 날 오후 콜룸바를 방문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나는 쾰른 대성당에 앉아 양 극단에서 한 건축가의 신조를 관통한 듯한 그 경험을 곰곰이 되새겨보며 우리가 전체성에 도달할 수 있는 두 가지 방식에 대해 생각했다.


나는 건축을 음악에 비유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는, 지독한 클리셰가 된 말─아마도 괴테가 에커만에게 했던 이 선의의 말은 이미 셀 수 없는 반복을 통해 약간은 호도하는 것이 되어버렸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더 이상 즐겁고 합치되는 느낌,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느꼈던 사실적이고 조화로운 그 공간적 경험이 아닌 애매하고 형이상학적인 것, 아무도 더 이상 그 단어들의 뜻을 알지 못하거나 알려고 노력하지 않는 것이 된 것이다. 시적인 표현을 유독 좋아했던 칸이 평면은 교향곡과 같이 읽혀야 한다고 말했을 때 나는 건축가들은 왜 그렇게도 음악에 대한 비유에 집착하는 것일까 생각했다. 우리가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을 들여다보고 그 찬탄할 만한 구조와 질서에 감동해 그것이 곧 평면 혹은 단면의 상세도가 부합해야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우리는 어쨌든 음악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음악은 악보를 통과해서 존재하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굴드는 악보를 보고 연주하는 것을 몹시 싫어했다. 그는 비물질적이고, 감지되지 않고, 존재하지 않는 것과만 관계하기를 원했고, 한 달에 한 번 접촉을 유지하기 위해서만 피아노를 연주했다. 건축가들은 음악과 같이 완전히 합치된 하나의 건물, 하나의 공간을 통해 이런 초월적인 경험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것일까? 그러나 굴드에게 언제나 마지막 차폐물로서의 소리가 있었던 것처럼 우리에게는 차폐물로서의 사물이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것과 관계하며, 어쨌든 얼어붙은 음악은 음악이 아니다.


나는 아직 콜룸바에서의 경험을 정리할 하나의 키워드를 결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번스타인의 노튼 강연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문득 그가 음악을 설명하고 음악을 연주하는 것을 들으며 콜룸바를 떠올렸다. 내가 그곳에 있었을 때 음악을 듣는 듯 느꼈다거나 어떤 음악적 비유를 떠올렸다고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나는 나중에 음악에 대한 진술 속에서 콜룸바를 기억해냈다. 그래서 오늘은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의 음악과 하나의 특정한 건축으로서의 콜룸바에 대해 글을 써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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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스타인은 피아노 앞에 앉아 C3 건반을 천천히 눌러 현이 자유롭게 진동할 수 있도록 내버려 둔 상태에서 C2 건반을 세게 쳤다. 우리에게 C2의 제1배음인 C3를 들려주기 위해서였는데 이와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기본음인 C2의 소리가 잦아든 뒤에도 희미하게 남아 있는 C3의 잔향을 확인할 수 있다. 사인파를 제외한 모든 음은 사실 이처럼 다수의 부분음으로 이루어진 복합음이다. 부분음 중 진동수가 최소인 음을 기본음, 나머지를 상음이라고 하며 기본음에 대해서 진동수가 정수배 관계에 있는 상음을 배음이라고 한다. 현이 진동하면 그 현의 작은 부분들, 즉 전체의 ½ 길이의 두 부분, 길이의 세 부분, ¼ 길이의 네 부분… 들도 각각 2, 3, 4배의 진동수를 가지고 함께 진동하면서 기본음 위에 순차적으로 겹쳐지는 배음을 내는 것이다. 자연이 이미 결정해 놓은 이 배음열을 살펴보면 첫 번째 배음은 항상 기본음과 진동수가 두 배 차이나는 완전8도 위의 음이다. C2의 경우 그 첫 번째 배음은 C3가 된다. 그다음 제2배음은 C3의 완전5도 위인 G3이다. 최초로 다른 음이 도출되는 이 완전5도의 관계─조와 조성을 확립하는 토닉과 토닉을 도우며 토닉으로 진행하려는 성질이 있는 도미넌트의 관계가 자리를 잡게 됨과 동시에 전체 음조직의 기초가 마련된다. 제3배음은 다시 C가 되는데 이 C4는 G3의 완전4도 위이고 제4배음은 다시 장3도 위인 E4이다. 한 음 내부에서 파생하는 이 세 음─기본음, 장3도 위의 제3음과 완전5도 위의 제5음이 이루는 3화음은 모차르트에서부터 교향곡의 완전한 잠재력을 실현시킨 말러에 이르는 모든 조성음악의 토대가 된다.


1700년대에 조성음악의 융성은 건반악기의 급격한 발달과 맥을 같이 했는데, 이로써 순정률의 문제점을 보완하는 교정된 음률의 정립이 필수적이게 되었다. 순정률을 최초로 이론화한 인물은 피타고라스였다. 그는 협화 음정을 찾아내기 위한 실험 중 악기에 달린 현의 길이와 진동수 사이에 일정한 수학적 관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주어진 현의 길이를 각각 ½, , ¾으로 하면 완전8도, 완전5도, 완전4도 음을 얻을 수 있음을 확인한 그는 기본음에서 출발하여 완전5도를 계속 반복하는 방식으로 크로매틱 음계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피타고라스 음계를 완성했다. 완전5도의 순환은 완전화음에서 출발한 이상적인 음률이었지만 실제로 완전5도를 12번 반복한 음정과 완전8도의 옥타브 음정이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이것은 2도 음정의 진동수의 비가 일정하지 않았기 때문인데, 이 말은 곧 순정률에서 조바꿈을 하기 위해서는 악기를 매번 새로 조율하거나 음정이 사전에 고정되는 건반악기의 경우에는 이론적으로 한 옥타브 내에 77개의 건반을 설치해야 함을 뜻했다. 이 실용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도입된 음률이 현재 세계적인 표준 음률로 사용되는 12평균율이다. 평균율은 진동수의 비를 일정하게 통일한 음률로, 12평균율은 옥타브를 12등분하여 1단위를 반음, 2단위를 온음으로 한다. 피타고라스가 고안했던 방식에 따라 완전5도를 12번 반복하면 C-G-D-A-E-B-F(G)-C(D)-G(A)-D(E)-A(B)-F-C와 같이 다시 최초의 기본음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각 음의 진동수를 미세하게 교정하지 않으면 돌아오는 C가 최초의 C보다 조금 높아지기 때문에, 평균율에서는 이 미소음정의 차이를 해소하기 위해 2센트 좁힌 완전5도(엄밀히 따지면 더 이상 완전하지 않은)를 반복하여 12음을 도출한다. 이 12음을 순차적으로 정돈하면 C-C(D)-D-D(E)-E-F-F(G)-G-G(A)-A-A(B)-B-C와 같이 비로소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가장 기본적인 크로매틱 음계가 완성된다. 진동수의 비가 유리수인 순정률과 비교해 각 반음에 대응하는 진동수의 비가 무리수인 122가 되어야 하는 평균율에서는 기준이 되는 완전8도를 제외한 어떤 음정도 사실상 완전화음이 되지 못한다. 그러나 미세한 청각적 만족을 포기하는 대신 이제 작곡가들은 이 교정된 음률을 통해 단지 12음만으로 모든 음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평균율을 처음 제안했던 인물은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아버지 빈센초 갈릴레이이다. 그는 1580년경 이미 7개의 온음 사이에 반음을 넣은 12음계를 제안했고 이어 17세기에 수학자 메르센은 최초로 진동수의 비가 무리수가 되는 평균율을 만들었는데, 후에 바흐가 이를 완성시켰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1권이 발표된 것은 1722년이었다.


완전5도의 순환을 반음 단위로 재배열한 이 크로매틱 음계로부터 다른 모든 음계가 파생된다. 이중 완전5도의 순환에서 순차적으로 선택된 7개의 음은 조성음악의 기본이 되는 다이어토닉 음계를 구성하는데, 기본음을 갖지 않고 조성과 무관한 크로매틱 음계와 달리 모든 장·단음계를 아우르는 다이어토닉 음계의 7음은 토닉과 도미넌트를 포함해 각기 다른 역할을 수행하면서 서로 어울려 하나의 조성을 확립한다. 평균율에 의한 크로매틱 음계의 완성─음의 통일은 이 12음으로부터 비롯하는 12개의 다이어토닉 음계와 다시 24개의 조를 작곡가들이 아무런 제약 없이 옮겨 다닐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했다. 무한한 가능성과 자유로서의 이 크로매티시즘에도 불구하고 음악이 와해되지 않고 언제나 전체적으로, 조화롭게 존속할 수 있는 이유는 그에 상충하는 다이어토니시즘이 그 힘을 통제하고 조절하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발산하고 변화하는 크로매티시즘과 질서를 세우고 조화를 만드는 다이어토니시즘의 관계는 니체가 그리스 비극을 통해 얘기했던 디오니소스적인 것과 아폴론적인 것의 화해와 결합을 떠올리게 한다. 디오니소스가 내밀한 심연과 혼돈을 의미한다면 아폴론은 태양빛과 같은 밝음과 질서를 의미한다. 자아도취적이고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디오니소스 위로 아폴론은 지혜의 그물을 친다. 이 두 음악적 힘에 대한 놀라울 정도로 예술적인 균형감을 가지고 있던 인물이 바흐다.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은 그 균형 속에서 음악이 어떻게 통제됨으로써 자유롭고 무한하게 발산하게 되는지, 다시 말해 하나의 조화로운 전체가 되는지를 보여준다. 그가 이룩한 음운론적 업적은 이후 베토벤까지 이어지는 음악사적 황금기의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었다.


내가 콜룸바에서 느꼈던 감동은 분명 전체성─마르크스가 사물의 내적 연관을 이루는 보편적 총합이라고 정의했던─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합치되는 분위기 속에서 감상적으로 이끌려 갔지만 나에게는 그 현상을 정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그러나 그 기억은 내 몸속에 계속 남아 있었고, 번스타인이 동일하게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는 두 종류의 힘과 그 균형 속에서 온전하게 유지되는 음악의 운명에 대해 얘기했을 때 나는 불현듯 그것이 바로 나에게 필요했던 설명이라고 느꼈다. 콜룸바를 하나의 전체로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이 힘의 균형이며 내가 음악의 크로매티시즘과 다이어토니시즘 옆에 각각 쓰려고 하는 단어는 폐허와 건축이다. 자연의 손이 음악의 구조 전체를 하나의 음 속에 각인해 놓은 것처럼 이 두 상반되는 힘은 사실 서로에게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콜룸바는 내가 느끼기에 그 교차점에 있다. 혹은 교차점이다라고 말해야 할까? 번스타인이 모차르트의 G단조 교향곡을 설명할 때 내가 콜룸바를 떠올렸다는 것은 재미있는 사실이다. 이 글쓰기는 바로 이 유비를 설명하기 위한 시도이다.



St. Kolumba 1946.jpg St. Kolumba nach dem Bombenangriff/ⓒ Konservator Stadt Köln 1946



폐허의 두 가지 원인은 자연재해와 전쟁이다. 영국군은 폭격기 1080여 대를 동원해 1942년 5월 31일 쾰른을 공습했다. 이 밀레니엄 작전을 통해 도시의 95% 이상이 20분 만에 파괴되었고 6만 명 이상의 민간인 사상자가 발생했다. 당시 쾰른 대성당과 어깨를 나란히 하던 성 콜룸바 성당은 이 과정에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외벽의 일부와 탑의 하단부, 회중석 북동쪽 기둥의 성모 마리아 조각상만이 파괴를 면했다. 종전 직후 이 ‘폐허의 마리아’를 보존할 새로운 예배당 설계를 위해 교구 사제가 고용했던 두 건축가 중 한 명이 고트프리트 뵘의 아버지인 도미니쿠스 뵘이었다. 예배당은 고트프리트 뵘의 설계안 대로 지어졌고 폐허의 마리아 예배당이 완성된 후 건축가는 건물의 잔해를 염두에 둔 성 콜룸바 성당의 재건축을 제안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후 성당의 잔해는 콜룸바 미술관의 정초식이 있던 2003년 10월까지 그 상태로 유지되었다.





이소자키가 말했듯이 실존적 위험을 다루지 않는 창조력은 있을 수 없다는 측면에서 전쟁은 존재의 어두운 면이다. 파괴된 도시는 피라네지의 동판화 속 모습 같다. 비들러는 언캐니가 본질적 삶이 불가능한 현대의 상황을 은유한다고 해석했다. 역사의 종말 혹은 역사 이후에 대한 논의는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언캐니는 아직 끝나지 않은 역사에 대한 마지막 몸부림과 같은 것이었을 수 있다. 소위 탈현대-포스트모던 역시 사라진 것을 조명한다. 그것은 지금 우리의 시대를 이루고 있는 필연적인 한 부분이다. 탈역사의 공백은 곧 건축에게 남겨진 유산과 같은 것이며 우리가 폐허의 의미에서 수용해야만 하는 것은 바로 이 공백이다. 그 해방된 상징들 속에서 보들레르의 늙은 방랑객은 홀린 눈으로 카푸아를 발견한다.


콜하스는 코니 아일랜드를 맨해튼의 인큐베이터로 보았다. 전혀 발생하지 않을 재앙들의 축적이 도시의 시작이었다면 모든 것이 파괴된 도시의 림보는 그러한 재앙들이 해방되는, 그리고 가장 폭발적으로 발생하는 어떠한 장소일 것이다. 말라르메는 발생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저 장소일 뿐이라고 했다. 콜하스의 재앙은 도시의 비밀스러운 정수이며 결코 연출되지 않는다. 파괴된 장소는 반대로 모든 것이 가능한 곳이 된다. 이러한 건축적 림보는 언제나 재구축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이 비결정의 상태는 플라톤이 이데아와 현상을 매개하기 위해 상정했던 제3의 공간, 혹은 빈터에 대한 묘한 알레고리처럼 느껴진다. 플라톤은 공교롭게도 이 코라를 체의 비유를 통해 설명했다. 이집트인들은 벽화나 조각상을 제작하는 데 모눈을 사용했다. 이때 예술가의 머릿속에 들어 있던 관념은 마치 체에 걸러지듯 모눈의 그리드를 거쳐 구체적 형상을 가지게 된다. 다시 말해 그곳에서는 언제나 무엇인가가 드러난다. 이것을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예가 전쟁 후의 도시다. 이소자키는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떨어진 24년 후 그 폐허 위에 다시 폐허가 된 자신의 초구조체들을 그렸다. 그는 남겨진 파편들은 오직 상상의 구축을 통해서만 복구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이 바로 구축의 사유로서의 건축이다. 이소자키의 구조체들은 전혀 그 장소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그것은 지어진 것이라기보다는 그곳에 추락했고 부서진 것처럼 보인다. 그는 그 장소의 공백을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여기서 접촉의 장소는 수면의 경계와 같다. 우리는 그곳에 가까워지고 있는 표상이 수중으로부터 상승하는 것인지 공중에서 하강하는 것인지 판단할 수 없다.





나에게 줌터의 갤러리는 폐허의 상공에 정박한 거대한 비행선처럼 느껴졌다. 그 몸체는 언캐니와 모순되는 숭고한 방식으로 전쟁의 잔해와 유적 위로 그림자를 드리운다. 그러나 그 비행선의 닻은 다시 금방 들어 올려지는 종류의 것이 아니라 차곡차곡 쌓인 수많은 벽돌들과 무게와 시간을 감내하는 가늘고 긴 기둥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나에게 그 건물은 폐허와 건축 어느 것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마치 둘 모두가 속하게 되는 경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고 그 균형의 중심은 자연의 일부분인 거대한 동굴과 같았다. 자연의 섬세한 조각품들과 별처럼 작고 무수히 흩어진 채로 빛나는 태양─그러나 그것은 불레의 거대한 구처럼 오히려 인간적 한계를 깨닫게 하는 그런 종류의 구조물이 아니었다. 은은하게 윤이 나는 기둥들이 천정이 아닌 무엇인가의 밑바닥을 받치기 위해 유적 한가운데서 솟아오르고 있음과 동시에 얇고 긴 벽돌들은 어느 순간 하늘에서부터 쌓여 내려오는 것처럼 보였다. 이 지속적으로 서로 상충하는 이미지들은 너무 강력하게 혼합되어 있어서 나는 마치 조류에 휩쓸려가듯 그것을 통과해갔다.


번스타인은 크로매티시즘의 유연성이 다이어토니시즘의 토닉-도미넌트 관계 속에서 체계적으로 통제되는 무한히 창조적인 방식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 부딪히는 두 힘의 균형 속에서 드러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정수이기도 한 애매모호함이다. 상층부의 선율이 크로매틱 음계를 통해 자유롭게 진행할 때 밑에서는 토닉-도미넌트의 안정적인 구조가 곡 전반의 흐름을 받치면서 두 힘은 양가적인 전체를 이룬다. 동시에 진행하는 이 두 선율의 조화는 애매모호함 속에서 표현이 어떻게 풍부해지는지를 보여준다.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부분은 균형 속에서 찾아지는 바로 이 애매모호함이다. 이것이 바로 모든 예술─음악과 공간의 신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건축가에게 필요한 것은 이 애매모호함의 구조이지 그것의 표현이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우리가 그 구조를 자명하고 확고부동한 것으로 느낄수록 우리는 그 신비와 더 가까워진다.


연주됨으로써 음악은 악기가 갖는 여러 제한들에 의해 이상적인 것에서 잠정적인 것으로 육화될 수밖에 없다. 굴드는 베토벤의 2번 협주곡 1악장을 연주할 때 음을 덜 투박하고 투명하게 만들기 위해 우나 코르다로 연주했다. 그는 색채는 구조를 현실화시키는 수단에 불과한 그런 음악을 특히 좋아했다. 색채의 음악과 구조의 음악을 대치시킴으로써 그는 모차르트를 탈색시키고 바르토크와 스트라빈스키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는 음색-악기-쾌락-연극성과 형식-문자-사고-사색의 두 가지 개념이 상반된다고 보았다. 그가 음악에서 과육─음을 제거하길 바랐던 것은 색채와 무관한 자체의 구조, 그 골조의 아름다움을 빛 속에서 환하게 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연주할 때 늘 음악을 수수께끼처럼 느꼈다. 그가 음악에 접근하고 그것을 표현할 때조차, 그것에 대해 무언가를 알 때조차 수수께끼는 닿을 수 없는 곳에 머무르지만, 종종 미(美)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도달된다. 미를 표지로 삼는 무한을 건드리기 위해서는 반대로, 완결된 형식에 복종하면서 유한한 수단들을 고의적으로 사용해야 한다. 수수께끼는 절대로 모호한 법이 없다. 굴드의 연주를 들으며 느끼게 되는 것은 우리가 어떤 장소에 처음으로 오게 되었으며 작품의 탄생에 참여하고 있다는 모종의 확신이다. 그는 마치 미지의 의미들을 해독해 가면서 자신의 존재를 연주하는 것 같다. 번스타인 역시 자신이 그 순간 직접 작곡하고 있다고 느끼며 지휘해야만 한다고 말했다.





소리는 언제나 굴드에게 형식과 구조로의 도상에서 차폐물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그는 상상의 음, 존재하지 않는 음을 원했다. 그는 불가능을 추구했다. 골드베르크 변주곡을 두고 그가 음악의 무형성이라고 불렀던 그것이다. 굴드가 바흐를 좋아한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다. 바흐는 건반악기를 초월하고, 어떤 악기로도 연주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굴드는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의 푸가를 자신이 어떻게 연습하는지 이야기한 적이 있다. 먼저 3성부 혹은 4성부를 함께 전체적으로 연주한다. 그런 다음 피아노 앞에 앉아 헤드폰을 끼고 녹음된 연주를 다시 들으면서 베이스 성부를 연주한다. 이 성부는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음악보다 더 멀리서 들려오는 동시에 손가락에서 솟아 나오기에 더 가깝게 느껴진다. 그러고 나서 테너, 알토, 혹은 소프라노 성부를 마찬가지로 다시 연주한다. 그가 선율을 싫어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하나의 선율밖에 없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의 고유한 형식과 구조에 대해 묻는 푸가를 좋아했다. 푸가는 한정되고 고정된 모티프에 작용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하고 달아나고 열려 있는 선율의 단편들에 작용한다. 이때 달아나는 존재들은 서로 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곡 전체를 관통하는 지속적인 밀도가 있을 뿐이다.


콜룸바의 구조에서 가장 놀라운 점은 그것이 주는 통일감이다. 번스타인이 모차르트가 G단조 교향곡에 사용한 섬세하고 정교한 구조적 수법들을 일일이 나열하기 위해서는 밤을 새워야 할 것이라고 말할 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음악이 자연스럽고 조화로운 것, 유연한 하나의 전체로 경험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 구조적 신비를 전부 이해하기 때문에 감동을 느끼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애매모호함의 방식을 통해 비로소 그 구조의 이면─그곳은 우리의 내밀한 존재성과 맞닿아 있음이 분명하다─을 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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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ddle Section of the Palant Altar, Facial Urns



쾰른 교구회가 운영하는 교구 미술관은 오랜 기간의 협상 끝에 성 콜룸바 교구회로부터 성당의 잔해가 남아 있는 부지를 매입하면서 새로 지어질 미술관 건물을 위해 ‘명상의 미술관’이라고 이름 붙인 새로운 전시 계획을 개발했다. 성 콜룸바 성당의 부지가 선택된 이유는 1970년대의 발굴 작업을 통해 부지 내에서 추가적으로 발견된 유적 때문이었다. 9세기에서 13세기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당의 세 기초를 포함해 도시가 창건된 시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요한 유적들이 방치되다시피 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설계 공모의 첫 번째 조건은 유적과 성당의 잔해를 있는 그대로 보존하는 것이었다. 교구 미술관 설립 150주년이었던 2003년, 미술관은 콜룸바라는 새 이름으로 성당의 폐허 가운데에 새 미술관 건물의 초석을 놓았다. 유적 위에 건물을 짓는 것은 건축가와 기술자들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험이었다. 줌터의 계획은 옛 성당의 흔적을 따라 부지 전체를 둘러싸는 것이었는데 기존의 잔해와 건물을 한 몸으로 만드는 이 작업을 위해서는 모든 부분에서 정확성과 세심한 주의가 필요했다. 성당 잔해의 조적벽 보강을 위해서는 직경 35cm, 깊이 14m에 달하는 천공을 한 뒤 강봉을 설치하는 마이크로 파일 공법이 적용됐다. 고딕 양식의 조적벽에 이와 같은 규모의 구조적 보강이 시도된 것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설치된 30개의 강봉과 유적 가운데에 세워진 14개의 기둥이 상부의 갤러리를 받치고 있는데, 높이 12m의 이 가는 기둥들은 고고학자들과의 협업을 통해 센티미터 단위로 그 자리가 미세하게 조정되었다.





기존의 잔해 위에 건물을 이어 짓기 위해 필수적이었던 과제는 적절한 석재를 개발하는 것이었다. 줌터가 1997년 제출했던 설계안에는 이미 새로운 석재에 대한 구상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를 바탕으로 몇 년의 연구와 공정 끝에 콜룸바 스톤이 완성되었다. 따뜻한 회색 계열의 콜룸바 스톤은 다양한 색조를 내면서 중세의 응회암, 현무암과 좋은 조화를 이룬다. 석재의 기본 규격은 기존의 조적 구조에 대응하면서 여과 돌쌓기가 가능하도록 결정되었다. 유적을 보존하기 위해서는 자연 그대로의 기후가 필요했기 때문에 자연광과 공기의 자유로운 유입을 위해 고안된 것이 이 여과 돌쌓기이다. 조적벽의 중심부에는 상대적으로 비용이 저렴한 적벽돌이 사용되었는데 두 조적층은 서로 맞물리는 구조로 연결된 상태에서 철근으로 보강되었다. 이는 익스팬션 조인트를 사용하지 않고 건물 전체를 하나로 만들기 위한 조치였다. 이와 같은 구조와 더불어 새로운 석재의 규격에 부합하는 기준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모든 공법의 시공은 광범위한 연구와 사전 실험이 동반되어야 했다. 여과 돌쌓기벽의 경우 중심부에 강봉이 설치되어야 했기 때문에 기본 조적벽보다 콜룸바 스톤 조적층의 사이 간격이 30-40cm가량 넓어져야 했고 이를 위해 몇 년에 걸쳐 여러 실물 모형들이 만들어졌다.



Crucifix
Madonna with Violet



콜룸바의 구조는 한눈에 드러나는 명확성 혹은 질서가 아닌 그 자연적인 힘, 마치 종유석처럼 자신의 내부에서 단단히 혼합시키는 듯한 힘을 통해 건물 이상의 것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 힘은 지각되는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 갑자기 깨닫게 되는 그런 종류의 힘이다. 우리는 그것이 단단하고 무너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그 가운데에 선 내가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던─그것은 불가항력적이었기 때문에─감정은 지금 돌이켜보면 모차르트의 교향곡을 들으면서 우리가 어떤 전체적인 것, 그리고 그것의 형용 불가능한 내적 조화에 관여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는 그 감동과 비슷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콜룸바가 특별한 이유는 그 전체적인 하나의 혼합물 안에 거대한 역사와 공간이 응집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흙 사이에서 뼛조각처럼 드러난 역사의 파편과 그 틈으로부터 샘처럼 흘러나오는 시간을 자신의 재료로 사용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렸던 건축가는 많지 않았다. 모든 건물이 그것으로 하여금 바로 그 지점에 서도록 하는 하나의 역사를 필요로 하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룸바의 특별한 조건은 그 경험을 쉽게 일반화시킬 수 없도록 만든다. 그곳은 역사와 시대, 예술과 건축이 한 지점으로 모아진 특이점처럼 느껴졌고, 다름 아닌 바로 그 구축적이고 불가항력적인 사실들이 단순히 피폭되어 무너진 성당의 잔해도, 2천 년의 역사도, 아름다운 건물과 그 내부에 보석들처럼 정렬되어 있는 예술에 대한 증거물들도 아닌, 그 모든 사이의 무언가를 채우고 있었다. 누군가는 그것을 공간, 또 다른 누군가는 그것을 음악이라고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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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나이더는 음악에 대해 대수의 복잡성과 더 큰 초연을 지향하는 사고의 움직임, 그리고 음들 속에 감추어진 확고부동한 기반이라는 말을 했다. 음악은 분리시킨다. 음악의 동강들이 정신 속으로 뚫고 들어오면 굴드는 자신과의 접촉점을 잃고 대화로부터, 또 그의 주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에서 초연해질 수 있었다. 때문에 아무것도, 심지어 마지막 차폐물인 소리조차도 그를 음악에서 떼어 놓으면 안 되었다. 찰스 아이브스의 곡 ‘대답 없는 질문’과 동명으로 강연 제목을 정한 번스타인은 음악은 어디로 향하는지를 묻는다. 나는 그 대답으로 콜룸바에서의 경험을 떠올렸다. 음악과 마찬가지로 공간 경험은 구조를 통과해 나가는 방식이다. 그 구조가 단단하고 합치되는 것일수록 우리는 수월하게 나아간다. 더 이상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모르겠다.


토론토 왕립 음악원 학생들이 굴드의 강연에서 그에게 들은 충고는 다음과 같았다. “혼자 있으십시오. 은총이라고 할 만한 명상 속에 머무르십시오.” 나는 콜룸바의 표어가 ‘명상의 미술관’인 것이 우연의 일치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불가사의한 소재에 대한 명료한 지식, 이것이 굴드의 연주의 초점이다. 듣기보다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 자신의 몸의 지체들을 분리시키고, 자신을 몸으로부터 분리시키는 것. 굴드는 적극적으로 주장했다. “나는 연주를 하는 것이 내 손가락이 아니라고 느낄 필요가 있다. 이 손가락들은 일정한 순간에 나와 접촉하고 있는, 그저 독립된 연장물들에 불과하다는 느낌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하고 있는 일에 온전히 전념해 있으면서도 나 자신과 거리를 두는 방법을 발견해야 한다.” 익명의 예술가로 돌아가는 것은 곧 그의 정체성과 직결되는 문제였다. 그는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어떤 다른 행성에, 심지어는 어떤 다른 태양계에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는데, 그때 난 그곳의 단 한 사람의 거주자처럼 여겨진다. 그러면 엄청난 환희를 느끼게 된다.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형태의 생명에 나 자신의 고유한 가치 체계를 내세울 수 있는 가능성─권위─이 내게 주어지기 때문이다. 또 나 자신의 형상에 따라 전 세계적인 완전한 가치 체계를 창조해 낼 수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바흐에 대해 언급하면서 그의 곡 속에는 세상으로부터의 후퇴감이 스며 있다고 말했을 때, 굴드는 또한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써놓고 보니 중언부언하는 글이 되었다. 굴드에 대한 부분은 슈나이더의 문장인 것도 많다. 이 글쓰기의 목표는 구조를, 혹은 구조에 대한 이미지를 최대한 섬세하고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음이 추출되고 정렬되면서 크로매티시즘이 정립된 과정, 콜룸바 스톤이 성 콜룸바 성당의 무너진 벽 위로 다시 쌓아 올려진 과정. 이런 것들에 대해 진술하기 위해서는 레싱이 시에 대해 말했던 것처럼 그 구조가 세워지기 위해 실제로 필요했던 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써야 하는지 모른다. 그것들은 전부 그로부터 발생한 하나의 형식, 혹은 무한개의 형식을 통해 어디론가 통과해 나가기 위한 준비 과정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비결정된 폐허의 상태에서 최상의 심급이라고 할 만한 건축의 상태로까지 올라오는 것─그 지난한 순환의 필연성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그 과정은 무한한 가능성과 하나의 가능성, 혼란과 조화 사이의 균형을 찾는 것이다. 구조는 그 두 힘이 만나는 지점에서 시작한다. 그 구조의 이면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나는 건축은 얼어붙은 음악이라고 쓰지는 않겠지만 번스타인의 질문을 바꿔 써 볼 수는 있을 것 같다.


Whither music?

Whither archite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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