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과 역에서 만나 저녁을 먹었다. 거의 1년 만이었지만 며칠 전 헤어졌던 자리에서 다시 만나 하던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집에 도착해 짐을 풀었는데 R의 어머니가 보내주신 라면과 김, 깻잎장아찌와 같은 것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것들을 선반 위에 차곡차곡 쌓아두니 마음이 풍족해졌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무엇일까? 우리가 사물을 볼 때, 우리는 언제나 그것의 일부를 형성하고 있는 듯하다.
바쿠스의 정원 쪽으로 가던 중 이제는 열매가 달린 꿀풀 끝에 붙어 있는 매미 허물을 발견했다. 껍질은 호박색이고 반투명했는데 두 눈이 돌출되어 있는 머리 부분과 갈라진 등 부분에서 광택이 났다. 그 내부는 그보다 더 작은 벌레들에게는 은은하게 빛나는 궁륭 같을 것이다. 단단하고 투명한 오무의 눈 껍질 밑에 누워 눈처럼 내리는 포자들을 올려다보는 나우시카 생각이 났다. 이 매미의 눈 껍질은 어딘가 빛을 잃은 각막처럼 이미 탁해져 있었다.
사물과 관계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관념주의에 빠지지 않으면서도 우리는 어쨌든 사물에 대한 우리의 태도를 결정해야만 한다. 이것은 우리가 감각하는 것에 기반을 둔 하나의 가능성이다. 우리와 사물의 관계가 오감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사물들은 사유가 아닌 살아지는 삶 자체로써 붙잡힌다. 사물과 우리 사이에는 가역적인 하나의 교통이 열리고, 그것을 통해 아마도 사물들은 우리들에게 비로소 ‘반짝거리게’ 된다. 사물을 알고자 하는 모든 시도는 자의적일 수밖에 없으며 그 과정은 우리가 바로 그 사물을 직접 제시함으로써 완결된다. 사물을 본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비활성의 돌들 속에서 하나의 형상을 보는 조각가의 행위이다. 니체는 이것을 생으로서의 예술이라고 했고, 바슐라르는 내밀함의 몽상으로부터 그의 철학을 개진해 나갔다. 모든 것은 변신이며 가능성이다. 소로우는 우리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진실을 계속적으로 흡입하고 그 안에 적셔짐으로써만 비로소 숭고하고 고결한 것을 파악할 수 있는 능력을 얻게 된다고 썼다. ‘우주는 끊임없이 그리고 순순히 우리의 착상에 응답해준다.’
사물들은 결국 모든 에이도스들이 무한히 퍼져 있는 거대한 그물의 교차점들인 것일까? 그리고 우리는 그 교차점들이 일반의 감각을 초월하는 보다 심원한 상징들이 되도록 하는 추상자와 환유자들인 것일까?
위대한 예술가들은 직접 자신의 그물을 잣는다. 그물은 세계관이다. 그것은 모든 사물들을 잇는 방식이며 그것을 바라보는 시야다. 위대한 예술가들은 개개의 교차점들에 머무르지 않고 전체의 그물 위를 산책한다. 그들은 고르디아스의 매듭을 풀었던 알렉산드로스처럼 자유롭다. 이것이 바로 통합하는 정신, 바로 신적인 단순함의 방식이다.
그물은 하나의 질서다.
그물은 건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