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륭으로 덮인 거대한 계단의 꼭대기에 그녀가 있다. 대리석을 쌓아 만든 뱃머리 위에 날개를 펼치고 서 있는 흰 몸. 얼굴과 두 팔이 없는 이 고상한 몸은 바람을 가르며 보이지 않는 세계를 모으고 있는 듯하다. 그 장관을 올려다보는 순간 목뒤의 털들이 곤두섰다. 강력한 공간, 말하자면 신적인 것이 갖는 힘은 우리에게 놀라움을 줌으로써 우리를 겸허하게 만든다. 날개를 펼친 승리의 여신은 발밑의 흉한 시멘트 블록이 제거된 상태로 회청색의 대리석 뱃머리 위에 산뜻하게 서 있었다. 이 거대한 조각상을 멍하니 올려다보면서 그 역동적이면서도 고상한 모습에 다시 한번 놀랐다. 왼쪽 날개를 본떠 석고로 복원한 오른쪽 날개까지 제외하면 한쪽 날개만을 가진 그 몸은 그보다 더 시적일 수 없을 것이다. 계단의 난간 구석에 기대앉아 오랫동안 그 모습을 감상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침묵하는 돌들 앞에 몰려들어 기념사진을 찍고는 가버렸지만 오히려 그런 환경이 그 돌들을 더욱 고귀하고 더욱 우리에게는 비밀스러운 것, 그럼으로써 영원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듯했다. 나는 그 사물이 내뿜고 있는 위대한 힘과 공간에 사로잡힌 채 한동안 입을 다물고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헬레니즘 조각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직각으로 연결된 밝은 두 개의 방에 걸쳐 나열되어 있다. 아프로디테 주변에만 역시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지만 그곳에 있는 조각품들은 하나하나 빠짐없이 전부 놀라웠다. 특히 샌들의 끈을 매고 있는 헤르메스의 다리와 등 근육은 도저히 돌을 깎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또 다른 아프로디테의 구부린 몸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데, 니케처럼 얼굴과 두 팔이 없는 그 부드러운 몸은 창가에서 홀로 화사한 빛을 받으며 우윳빛으로 빛났기 때문이다. 수많은 조각품들이 세워진 방을 천천히 가로질러 산책하는 것은 큰 즐거움이었다. 다채롭고 아름다운 돌들은 각각 특유의 신비로운 존재를 발산하고 있었고, 아마도 그 이유에서 공간은 특별한 풍요로움 속에 있었다. 이곳에서부터 이집트 미술을 보기 위해서는 계단을 내려가 붉은 스핑크스를 지나야 한다. 신화적 동물의 크기에 딱 맞게 지어진 듯한 그 동굴 같은 공간의 낮고 둥근 천장과 벽 속에서는 모음으로만 이루어진 조용히 울리는 듯한 소리가 났다. 스핑크스의 옆에는 파라오가 그려진 오래된 벽화의 일부가 걸려 있는데, 예민한 사람들이라면 이제 우리는 더 이상 신들과 유희하는 공간에 있지 않음을, 우리는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관문 앞에 도착했음을 어렴풋하게 느꼈을 것이다.
이집트 무덤의 벽화 속 인물 묘사는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사람의 신체 부위는 빠짐없이 그려져 있고 모두 한결같은데, 몸통은 정면을 그렸지만 양 팔과 다리는 옆에서 본 모습을 그렸다. 특이하게도 양 발은 모두 엄지발가락이 보이는 같은 쪽의 발을 두 번 그린 것이다. 이 다소 부자연스러워 보이는 그림은 사람의 모습이 최대한 온전히 보이도록 하기 위해 고안된 방법이었다. 사후 세계로 연결되는 이집트의 무덤에서 조각이나 그림은 사자가 반대편으로 무사히 넘어갈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을 한다. 그림을 보는 대상은 사람이 아니라 영혼이었으며, 그 영혼이 사후 세계에 도착할 때까지 자신의 모습을 잃지 않도록 상기시켜주는 것이 바로 이 그림이었다. 이에 분명 영향을 받기는 했지만 그리스인들의 인물 묘사는 훨씬 더 자연스럽고 인간적이다. 그들의 사람은 이집트의 경우와는 달리 완결성을 가질 필요가 없는 심미적이고 장식적인 것이었다. 그들은 아는 대로가 아닌 보이는 대로 그렸기 때문에 오른쪽에서 보이지 않는 왼쪽의 팔이나 다리는 그리지 않았다. 그리스인들은 자연스럽고 인간적인 모습을 아름답다고 느꼈던 것이 분명하다. 이 사실은 그들의 자유분방한 조각에서도 잘 드러난다. 반면 수많은 벽화와 무덤 안에서 발견된 작고 정교한 조각품들을 지나 도착한 마지막 방에서 이집트의 신들은 거대하고 검은 기둥들처럼 먼 곳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땅 위의 인간들은 강철보다도 강한 호루스의 부리를 우러러봐야만 했을 것이다. 그곳은 풍요로움보다는 절대적인 힘과 인간을 짓누르는 무거운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카노바와 이탈리아 조각품들까지 전부 둘러본 뒤에는 이미 많이 지친 상태였다. 마지막으로 세 개의 그림을 보기 위해 1층으로 올라갔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회랑에서는 수많은 그림들보다도 그 수많은 그림들이 뒤덮고 있는 성대한 공간의 전체적인 효과가 인상 깊었다. 판니니의 그림 속으로 들어간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림 속에서처럼 회랑이 환상적으로 느껴지지는 않았다. 바로 이곳의 리노베이션을 맡았던 위베르 로베르는 판니니에게서 영감을 받아 ‘폐허가 된 루브르 박물관의 대회랑’이라는 그림을 그렸는데, 이것은 이소자키가 츠쿠바 센터를 설계하면서 폐허를 그렸던 것과 똑같은 것이다. 디드로는 로베르의 그림 앞에서 남는 것은 오직 시간뿐임을 한탄했다.
주택을 위한 스터디
· 단순하고 명확한 형태
· 시적인 공간
· 이 시대의 생활상
집의 각 구성요소들이 각각 인간성의 어디에 바탕을 두고 있는지 추적할 것. 몽상에 기여하는 건축?
‘거주한다는 근본적인 기능에 대한 우리들의, 말하자면 태어날 때부터의 애착이 드러나게 되는 그러한 가치들’
주택은 ‘어떻게 우리가 우리의 삶의 공간에서 삶의 모든 모순적인 양상과 조화를 이루며 살고 있는가, 어떻게 우리가 하루하루 우리 자신을 세계의 한 구석에 뿌리박고 있는가’를 말해야 한다.
소로우
67. … 단지 먼저 우리의 집이 우리의 삶과 맞닿는 면을 마치 조개의 내부처럼 아름답게 장식하되, …
73. 지상의 건축물이 사라지고 나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후세 사람들은 이 지하 저장실의 흔적을 본다. 그러고 보면 아직도 집이란 땅굴 입구에 세운 일종의 현관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74. … 경우에 따라서는 우리의 일시적인 필요성이라는 이유보다 더 좋은 이유를 발견하게 전에는 건물을 아예 짓지 않기로 한다면 어떨까?
126. 집이란 ‘세데스’, 즉 ‘앉은 자리’ 이외에 무엇이겠는가?
131. 그처럼 가벼운 겉옷만을 걸친 이 집의 뼈대는 내 주위에 형성된 하나의 결정체 같은 것이었고 집을 지은 사람인 나에게 반응을 했다. 이 집은 윤곽만을 그린 그림처럼 암시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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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문에 대하여
히치콕의 영화 Rear Window, 그 반대의 경우 호퍼의 Cape Cod Morning.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 맑은 공기… 이때 마치 우리는 공간을 호흡하는 것 같다. 창문이 없는 공간은 영원히 정지해 있다. 피라미드와 그리스 신전의 셀라 - 이 공간은 삶을 위한 공간이 아닌 죽음(최고도의 정신으로서의 죽음, 영원히 죽지 않는 것으로서의 영원한 죽음)을 위한 공간이다. 창문은 언제나 삶에 대한 것이다.
미닫이창과 여닫이창의 비교. 미닫이창의 경우 반은 언제나 닫혀 있다. 이것은 창구 직원의 창문이다. 반면 창문을 앞뒤로 여는 행위는 창문의 진정한 역학, 숨 쉼의 역학을 그대로 반영한다. 덜컹거리던 창문이 갑자기 양옆으로 활짝 열리면서 강풍과 빗방울들이 방 안으로 쏟아져 들어와 나른하게 졸고 있던 사물들을 깨운다. 이때 창문은 입체적인 것이다. 그러나 창구 직원의 창문은 언제나 평면적인 상태로 머물러있다. 오로라 공주가 숲속의 오두막에서 이른 아침 잠에서 깨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그녀의 다락방 창문을 여는 것이다. 이때 이 창문은 여닫이여야만 한다. 양손으로 창문을 밖으로 힘껏 밀어 열어젖히는 것은 아침을 찬미하는 가장 순수한 의식이며, 그 순간 쉬페르비엘이 썼던 것처럼 숲 전체가 그 작은 다락방 안으로 초대된다. 창문의 역학은 긴장과 분출의 역학, 또한 치유와 해소의 역학이다. 그러한 노력은 건강에 이로운 것이다. 응축과 확산의 경계로서의 창문에서 거소의 호흡이 일어난다. 휴식이 더욱더 응축된 것일수록 거세게 빠져나오는 존재의 확산은 더욱더 커진다.
달려오라, 바다를 건너는 기사들이여
나는 하늘 지붕 하나밖에 없으니
그대들이 머무를 장소가 있으리라.
산의 몸채가 내 창문에서 멈칫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