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30 목 1

by 홍석범

7시 반쯤 일어나 조식을 먹고 R과 헤어졌다. 생 라자르 역에서 지역 열차를 타고 40분 정도를 달려 푸아시에 도착했다. 아침부터 비가 올 것 같았지만 다행히 날씨가 다시 조금씩 개는 모양이었다. 빌라 사보아까지 걸어 올라가는 길은 한적하고 조용했다. 몇 개의 오래된 아치를 지나 큼직한 돌들이 깔린 언덕길을 올라갔다. 곧 작은 주택들이 옹기종기 모습을 드러냈고 길이 점점 좁아져서 두 사람이 서로 지나갈 수 없을 정도의 폭이 되었다. 높이가 낮은 담장목을 따라 구불구불한 길을 십 분 정도 더 올라가자 양옆으로 키가 작은 가로수가 심어진 조금 더 넓은 길과 버스정류장이 나왔다. 그 바로 맞은편이 빌라 사보아로 통하는 입구였다.


그 첫 모습에 생각했던 만큼 감흥이 크지는 않았다. 건물은 어쩔 수 없이 조금은 낡고 초라해 보였다. 기둥들을 따라 반 바퀴 빙 돌아가면 비로소 정면이 보인다. 놀랍게도 나는 그제야 지상층 차고의 굽은 벽이 진녹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건축 역사상 가장 유명한 램프를 올라가니 한 일본인 부부가 종이에 인쇄해 온 컬러 팔레트를 문과 벽 등에 대보며 무언가를 열심히 메모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들과 나뿐이었다. 틀이 얇은 유리문을 통과해 넓게 트인 살롱으로 들어갔다. 일자로 뚫린 긴 창 너머로 푸른 수목이 보였고 마치 공중에 떠 있는 거대한 선박의 데크 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건물은 처음 지어졌던 1900년대 초 7에이커의 넓은 언덕배기 한가운데에 마치 신전처럼 서 있었다. 건물 주변은 지금처럼 나무들이 아닌 넓게 펼쳐진 전경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건축가에게 가장 중요했던 것은 아마도 이 전경을 바라보는 것, 그리고 똑같은 방식으로 바라봐지는 것이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빌라 바로 옆에 중학교를 세우기 위해 프랑스 정부가 사보아 가족에게서 넓은 땅의 일부를 헐값에 넘겨받으며 이 건물의 공간적 가치는 어느 정도 훼손될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더 이상 건축가의 의도 대로, 마치 그가 처음 뱃머리에 서서 멀리 아토스 산 위의 파르테논을 바라봤던 것처럼 이 건물을 바라볼 수 없게 되었고, 마찬가지로 내부에서 역시 대부분의 전경은 가려지게 되었다. 나는 살롱 중앙에 서서 그 공간을 두르고 있는 끝없는 전경을 머릿속으로 상상해보려 했다. 어느 눈부신 오후 어쩌면 정말로 사보아 가족은 아기자기한 도시를 내려다보는 거대한 선박의 뱃머리에서 차를 마시고 있는 듯한 황홀한 느낌을 받았을지 모른다.


빌라 사보아는 언뜻 실용적인 정신에 입각한 정교한 기계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코르뷔지에의 가장 내밀한 예술적 동기들을 최종적으로 현실화시킨 건물이다. 건축가는 아름다운 이미지를 만들어내기 위해 끝까지 평지붕을 고집했는데 결국 가족이 이사한 지 불과 일주일도 안되어 아들 로제의 침실로 물이 샜다. 그 양이 너무 많아 아이는 가슴에 염증이 생겼고, 이것이 폐렴으로 발전하는 바람에 샤모니의 요양원에서 한 해를 보내야 했다. 사보아 부인은 십 년 동안 꾸준히 코르뷔지에에게 보수를 부탁하는 편지를 썼지만 건축가는 응답하지 않았다. 알랭 드 보통은 코르뷔지에를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다음과 같이 질문했다. 모더니즘 건축가들은 내심 아름다움을 염두에 두고 설계를 했으면서, 왜 자신의 작품을 주로 기술적인 맥락에서 정당화했을까? 로제의 방 중앙의 옷장을 돌아가면 뒤편 창가 구석에 작은 책상이 있다. 예산 문제로 부엌 옆의 식료품 저장실이 급작스럽게 손님용 방으로 개조되면서 자신의 작은 화장실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지만, 선선한 가을 아침에 그 책상에서 책을 읽으며 로제도 몇 개의 좋은 추억을 만들지 않았을까? 욕조의 모양을 따라 볼록하게 튀어나온 벽은 분홍색인데, 바라간의 분홍색과는 달리 다소 평면적으로 느껴진다. 무엇보다 바라간은 이미 자연 속에 들어 있는 녹색은 절대 쓰지 않았다.


건물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한쪽 벽이 파란색으로 칠해진 사보아 부인의 내실을 통해 중정으로 나갔다. 중정에 면한 살롱의 거대한 유리문은 원래 개폐가 가능하지만 현재는 보존 상의 이유로 손잡이가 분리되어 있는 상태였다. 아래 정원에서는 아마도 답사 여행 중인 것으로 보이는 일본인 남학생 셋이 스케치북에 무엇인가를 끄적이고 있었다. 유난히 일본인들이 많이 보이는 이유는 건축가가 도쿄에 지었던 미술관 때문일까? 그들은 코르뷔지에가 동방으로 여행을 떠났을 당시의 나이 정도 돼 보였다. 램프로 다시 옥상의 솔라리움까지 올라갔다. 정사각형의 창 너머로 프랑스 정부가 사보아 가족의 땅에 코르뷔지에의 이름을 따 세운 중학교의 농구 코트가 보였다. 이 창은 코르뷔지에가 어머니를 위해 지은 작은 집에도 있는 창이다. 일광욕을 위해 놓인 두 개의 선베드는 둥근 벽 안에 아늑하게 감추어져 있다. 건축가는 절묘하게 안과 밖, 집과 전경을 구분했다.


조금 답답한 마음이 되어 정원으로 내려왔다. 이 건물을 집이라고 부르는 데에는 어딘가 께름칙한 부분이 있었다. 바슐라르는 이 ‘집’에 대해 무엇을 쓸 수 있었을까? 이 기념비는 분명 사람보다는 건축에 기여하고 있다. 이 모순이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는지는 조금 더 깊이 생각해봐야만 할 문제이다. 어떻게 코르뷔지에는 사보아 부인의 꾸준한 부탁에도 십 년 동안 이곳에 찾아오지 않을 수 있었을까? 그러면서도 그는 전쟁 후 폐허가 된 채로 방치되던 이 건물이 헐리는 것을 막기 위해 말년에 자신이 직접 보존 운동을 시작하고 영향력이 있는 지인들의 도움을 구했다.



다시 파리행 열차를 탔을 때는 벌써 두 시였다. 호텔에서 아침에 챙겨 온 치즈와 비스킷을 조금 먹었다. 노트르담 근처의 한 카페에서 R과 만나 늦은 점심을 먹는데 K에게서 도착했다는 연락이 왔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와 짐을 챙겨 K와 만나기로 한 역으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새 숙소는 걸어서 15분 거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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