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과 마찬가지로 근 1년 만에 보는 K는 약간 살이 빠진 모습이었다. 숙소는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의 꼭대기 층이었는데 내부은 안락하게 꾸며져 있었다. 짐을 풀고 한숨 돌리면서 K는 비행기를 놓칠 뻔한 자초지종을 얘기했다. 한 시간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인상주의 작품들을 다 돌아보고 2층으로 내려왔을 때쯤 해가 졌지만 야간 개장을 한 미술관의 모습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별로 특별하지 않았다. 상상했던 것처럼 거대한 온실 같은 지붕의 철 구조물 사이로 밤하늘을 본다든지 하는 것은 전혀 불가능했다. 그러나 2층 발코니에 서서 수많은 예술품들로 치장된 그 거대한 잡종의 공간을 내려다볼 때는 뒤통수가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프랑스 정부가 페르디낭드 두테르의 우아한 거인 같은 파빌리온을 철거하지 않았더라면 이곳보다 더 근사한 예술 공간이 되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R의 말에 따르면 서울시 역시 서울역사를 미술관으로 바꿀 계획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러 현실적인 이유에서 성사되지는 않은 모양이다. R의 지적대로 중앙의 구조물은 임시적인 무대 미술 같은 느낌이 든다. 어딘가 이집트 건축을 떠올리게 하는 그 다소 둔탁하고 육중해 보이는 모양은 공간 전체의 분위기와 잘 맞지 않았는데, 특히 큰 상앗빛 석판으로 마감된 두꺼운 벽들은 조금 멍청해 보였다. 우리는 모두 이미 많이 지쳐있었기 때문에 별 의욕 없이 그저 산책하듯 걸었다. 거대한 그림들을 보며 셋 모두 약간 바보들처럼 감탄했다. K는 농담 삼아 그림은 클수록 좋다고 했는데 나는 그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호크니는 실제로 숲만 한 그림을 그린 적이 있다.
아홉 시가 조금 넘어 미술관을 나왔다. 별로 현명한 결정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숙소까지 걸어서 돌아왔다. 길거리 곳곳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있었고 바와 음식점들에는 빈자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평일 밤 같지 않은 분위기에 우리도 다시 조금 들뜬 기분이 되어 마트에서 간단한 안줏거리들을 산 뒤 새벽까지 샴페인과 와인을 마셨다.
근무 때문에 평소 주말보다 일찍 일어났다. 10시쯤 빨래를 하고 의자 자리로 갔다. 호랑나비가 가까이 날아왔는데 날갯짓을 할 때마다 동그랗게 말린 주둥이가 부드럽게 풀렸다 감겼다를 반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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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인 빌라에 대한 구상을 조금씩 하고 있다. 아무튼 이것은 창문에 대한 질문이다. 대청과 벽난로, 다락이 있다.
말테의 수기 중간에 끼워둔 보랏빛 꽃잎 뒤로 ‘영원을 축약해놓은’과 ‘한없이 커져가는’이라는 문구가 비쳐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