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8. 31 금

by 홍석범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마지막 날이니만큼 셋 모두 각자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하기로 했다. R은 생 샤펠과 미슐랭 가이드에 소개된 한 레스토랑을, K는 에펠탑의 전망대를, 나는 오랑주리를 골랐다. 생 샤펠에서 시작해 세느강을 따라 서쪽으로 거의 일직선으로 움직이면 되는 동선이었다. 대단한 규모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둘러진 생 샤펠은 성골함이라는 이름이 잘 어울리는 화려한 보석 상자 같은 공간이었다. 그리스도의 면류관을 안치하기 위해 지극한 기독교인들은 600제곱미터에 달하는 색깔 유리로 예배당을 지었다. 아마도 R의 말대로 신자석이 모두 치워져 있었기 때문에 그곳은 다소 관광지처럼 느껴졌다. 맞은편의 노트르담에도 들렀다. 우리가 닳고 닳은 나무 벤치에 앉은 뒤 1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와 마찬가지로 무익한 의무감을 해소하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이 광장의 맞은편 끝까지 긴 줄을 만들었다. 미사가 시작되려는 듯한 분위기여서 잠시 앉아 있다가 곧 그곳을 빠져나왔다. R의 레스토랑은 마침 바로 근처였다. 식사는 그럭저럭 무난했다.


수련방에서 많은 사람들 때문에 집중하기가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말로 표현하기 힘든 호화로운 느낌이 나를 사로잡았다. 수많은 마이스터들이 지금껏 예배당과 궁전의 벽과 천장을 치장해온 것과 크게 다를 것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와는 정반대로 이 방은 오로지 그림을 위해, 말하자면 바로 이 그림의 일부가 되기 위해 설계되고 지어진 것이기 때문에 그 과정과 결과물에는 우리가 아는 벽화의 개념을 초월하는 어떤 훨씬 더 호화롭고 고상한 의미가 담겨 있다. 그것은 말 그대로 종합예술이며 대단히 공감각적인 방식으로 두 가지의 예술 분과, 즉 회화와 건축에 기여한다. 무엇보다 그 공간은 벽이 없는 공간, 그림으로만 세워진 공간이다.


이것은 물론 이렇게 쉽게 이야기하고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다. 이 공간은 말하자면 본질적으로 현상학적인 장소이며, 단순히 갤러리라고 부를 수 없는 그 공간이 존재하는 방식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아야만 한다. 모네는 아침부터 밤까지의 시간을 그린 것이기도 하기 때문에, 하나로 이어지는 그림의 원환성을 통해 우리는 영원을 경험한다. 이때 우리가 이 장소에서 공간이라고 부르는 것은 어쩌면 다름 아닌 바로 그것, 미지의 방식으로 직물화된 그것일지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 내부에서는 시간이 전혀 흐르지 않는다고, 시간이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이것은 두고두고 생각해볼 만한 특별한 현상이다. 둥근 벽을 천천히 따라 걸으면서 오묘하게 변하는 색들을 관찰했다. 인상주의 회화에 그다지 큰 관심이 없던 나는 오르세에서 루앙 성당의 네 그림을 본 뒤 그것은 대단한 작품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마도 그것이 건축물이었기 때문에, 말하자면 어떤 명확한 대상이 생성의 과정 속에 던져진 상태로 포착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인상 깊었던 것인지 모른다.


지하의 컬렉션에는 앙리 루소의 작품도 몇 개 포함되어 있었다. 그림을 전부 둘러본 후 나는 다시 위층으로 올라가 두 개의 수련방을 마지막으로 한 바퀴씩 돌고 나왔다. 별로 유익하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그래도 그렇게 하고 싶었다. K가 물을 사러 간 사이 R과 나는 분수대 근처에서 바람이 불 때마다 조금씩 튀겨오는 물방울들을 맞으며 작은 연두색 철제 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느 정도 휴식을 취한 뒤 우리는 별로 볼 것이 없는 샹젤리제 거리를 따라 개선문까지 걸어갔다. 많이 걷고 싶지 않았지만 역시나 이상한 의무감에 의해 개선문까지 긴 거리를 걸어 내려온 것이다. 기억하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육중한 모습의 개선문에 나는 중학생 정도의 나이밖에 되지 않았던 과거의 내가 지금의 나보다 개선문을 더 작게 느꼈다는 사실이 이상했다. 마침 그 아래에서는 군악대와 가방을 메고 꽃다발을 든 두 학생이 아마도 전쟁 사상자들을 위한 일종의 추모식 리허설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끼여 군악대가 첫 번째 짧은 연주를 마칠 때까지 서 있었다.


길쭉한 샹 드 마르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자리를 잡고 앉아 술을 마시거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는 조금 들뜬 마음으로 도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 보이는 거대한 철제 구조물을 향해 걸어갔다. 브라키오사우루스의 네 다리 같은 기둥 밑은 역시나 벌레 같은 사람들로 바글거렸다. K의 선택으로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특히 나는 조금 비참한 심정으로 그 무리의 끝에 가서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번 여행에서 가장 오랜 시간을 기다려 엘리베이터를 타기 위한 티켓을 구매한 뒤로는 그래도 모든 과정이 조금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막상 에펠탑의 꼭대기에 도착해서는 이것도 한 번쯤 해볼 만한 경험이라는 생각을 했다. 파리의 전경이 펼쳐졌고 작고 질서 정연한 집들은 거의 비슷비슷한 회색 빛깔로 반짝거렸다. 해가 서서히 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우리는 전망대를 한 바퀴 돌고 사진을 몇 장 찍은 뒤 다시 지상으로 내려왔다. 근처의 이탈리안 음식점에서 R이 저녁을 샀다. 그렇게 기분 좋게 마지막 날도 금방 지나가버렸다.






2015. 8. 31



쇼펜하우어와 스탕달의 미학 비교.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진정시키는 것으로서의 미의 효과를 기술했다. 그러나 그는 칸트의 ‘무관심하게’라는 용어를 지극히 개인적인 방식으로 차용했고, 니체는 ‘의욕의 고역의 안식일’로서의 미의 종착점이 쇼펜하우어에게 큰 관심사였음을 지적했다. 에피쿠로스가 찬미했던 고통이 없는 상태에 대한 일종의 약속으로서. 쇼펜하우어 못지않게 관능적이지만 행복한 천성의 소유자였던 스탕달은 반대로 미는 행복을 약속한다고 했다. 이에 의한 ‘의지의 자극’, 또한 ‘관심의 자극’이야말로 적과 흑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물론 이러한 자극은 보다 섬세하고 명랑한 특정 서정시인을 통해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표출된다. 순결과 관능의 모순. 포이어바흐의 ‘건강한 관능’은 삶의 자극으로서 생존을, 또한 고통을 유도한다. 쇼펜하우어는 금욕주의 ─ 무관심한 미의 정신을 신봉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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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논문 요약


금욕주의적인 성직자는 거의 모든 시대에 규칙적으로 출현한다. 삶에 적대적인 이러한 종족을 되풀이하여 성장시키는 것은 최고급의 필요성임에 틀림없다. 이때 힘의 원천─삶과 의지의 자극으로서의 관능─을 봉쇄하기 위해 힘을 사용하려는 시도, 자발적인 희생, 자기 상실과 질책이 추구되며 삶의 본능은 공격당한다. 이것은 감각이나 외관에 대한 단순한 승리가 아니라 보다 고차적인 종류의 승리이며 이성에 대한 폭행이자 잔인성이다. 진리와 존재의 왕국은 있지만, 이성이 그곳에서 축출되었다고 선언하는 금욕주의적 자기 경멸은 칸트가 주장했던 사물의 예지적 성격, 즉 지성에게는 사물이 전혀 파악될 수 없다는 것을 지성이 바로 이해하게 되는 사물의 분열적 속성과 같은 것이다. 금욕주의자들에게 표현되는 것처럼 보이는 이러한 자기모순은 일종의 잠정적인 표현, 하나의 해석·형식·합리화이며, 그 진정한 본성이 오랫동안 이해될 수 없었고 오랫동안 그 자체로 표시될 수 없었던 그 무엇에 관한 심리적인 오해이다. 이 숨겨져 온 본성은 다름 아닌 퇴화되어가는 삶의 본능과 구원 본능이며 바로 이것에서 금욕주의적 이상이 생겨났다. 삶은 언제나 모든 수단을 강구해 자신을 보존하려고 하며 국부적인 생리적 장애와 피로가 발생하게 되면 이에 대해 끊임없이 새로운 수단이나 착상으로 투쟁하는데, 금욕주의적 이상은 바로 이러한 최고급의 수단이며 병약한 자의 수단이다. 그들은 건강, 성공, 강함, 자부심, 힘의 개념을 왜곡하고 전도시키며, 그들의 정의 사이에서 건강한 자는 스스로의 행복에 대한 권리를 의심하게 된다.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원한이라고 하는 가장 위험한 폭발물을 끊임없이 저장하고 있는 병자들의 무리 내부에서 그들의 무정부 상태와 그 안에서 수시로 시작되는 자기 해체에 대항하여 교활하게, 엄격하게, 은밀하게 싸우고 조절한다. 이러한 폭발물을 폭발시킬 때, 당사자가 산산조각 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바로 그들의 기교이다. 즉, 성직자란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키는 자이다. 모든 고통받는 자들, 병자들은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찾는다. 그들은 그들의 감정을 배출할 대상을 필요로 하는데, 이러한 방어적 반격, 말하자면 돌발적인 위해에 대한 반사운동으로써 구해지는 마취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으며 고통의 참된 원인, 즉 생리학적인 원인─교감 신경, 혈액 순환 또는 신체 기관 등의 문제─은 감추어진 채 있게 된다. 이러한 원한의 배출에 대한 마비 작용은 그만큼 가능한 한 거친 하나의 감정을 필요로 하는데, 바로 이때 원죄의 개념이 탄생한다. 성직자는 우리에게 오로지 우리 자신이 우리 스스로에 대한 책임을 진다고 외침으로써 원한의 방향을 변경시킨다. 삶의 치료하는 본능이 이와 같은 방법으로 성직자들을 통해 하나의 기발한 착상을 시도하면서 성직자들에게는 죄와 영원한 벌 등의 개념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금욕주의와 그 이면의 죄의식은 지금까지 정확하게 형식화할 수 없었던 사실들에 대한 하나의 인과적 해석에 불과하다. 그러나 이 경우 삶의 본능이 전망하는 치료의 방식은 오히려 병을 촉발시켜 그것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방향인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이곳 공기는 병에 걸리게 하는 데도 좋단 말입니다, … 공기가 일단 병을 촉진시키고, 몸에 혁명적 변화를 일으켜 잠재하고 있는 병을 촉발시킵니다. ) 금욕주의적 성직자는 그가 싸우는 대상이 고통의 원인이 아닌 고통 자체라는 면에서 진정한 의사는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는 생리적 장애자의 깊은 우울, 피로, 슬픔을 일시적으로나마 극복하기 위해 어떤 감정의 자극이 있어야 하는지를 대단히 예민하게, 대단히 세련되게 파악하고 있었다. 이러한 장애 감정의 원인이나 치료를 단지 심리적·도덕적으로만 추구하고 시도하는 것이 종교의 가장 일반적인 형식이다. 사람들은 가장 먼저 생명감 일반을 최저점으로 끌어내리는 수단, 즉 최면을 통해 고통과 불쾌감과 싸운다. 의욕과 소망을 전혀 가지지 말 것, 감정이나 를 만드는 모든 것을 피할 것, 우둔해져야 한다는 파스칼의 원리에 따라 삶을 진정으로 아직 의식되지 못한 채 계속 유지되는 최소한의 물질 소모이자 신진대사의 상태로 축소시킬 것. 이러한 ‘해방’의 상태야말로 온갖 정신착란과 환청, 환시에 이르는 길을 열 수 있다. 이러한 상태에 사로잡힌 자들은 이러한 최면을 마침내 앎, 진리, 존재로 받아들인다. 최면에 걸린 허무의 감정, 가장 깊은 잠의 휴식, 간단히 말해 고통이 없는 상태 ─ 모든 병자들은 이것을 최고의 선으로, 적극적인 것 자체로 느껴야만 한다.


또 다른 금욕주의적 훈련은 기계적 활동이다. 이것의 다른 이름은 ‘노동의 축복’이다. 단지 반복되는 한 행위만이 의식에 들어오며, 결과적으로 그 속에는 고통이 들어설 여지가 없게 된다. 여기에 더해 성직자는 선행을 하고, 베풀고, 안심시키고, 도와주고, 설득하고, 위로해주고, 칭찬해주고, 대우해주는 등의 이웃 사랑을 처방함으로써 근본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가장 삶을 긍정하는 충동의 자극, 즉 가장 작은 우월감의, 힘에의 의지의 자극을 처방한다. 이것들 모두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오래된 고통에 대해 가장 실효성 있는 마취제로 사용된 ‘거친 원죄의 감정’의 무절제이다. 그리고 이 무절제함을 야기하는 금욕주의적 이상은 다름 아닌 성직자의 손안에서 그 형태를 얻게 된 죄책감이다.


병약한 자는 어떤 방식으로든 자기 자신에 대해 괴로워하며, ‘무엇 때문에’를 잘 알지 못한 채 절실히 그 이유─이유는 고통을 경감해주기 때문이다─를 찾기를 바라다가 마침내 비밀을 알고 있는 한 사람에게 조언을 구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고통 자체를 벌의 상태로 이해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오랜 우울증과 피로는 이러한 처리 체계에 의해 철저히 극복되고, 삶은 다시 매우 흥미로워진다. 삶의 본능은 성공한 듯 보이지만, 이것은 물론 표면상에서만의 문제이다.* 금욕주의적 이상은 이러한 방식으로 굳건해졌고 삶은 말 그대로 일시적인 최면의 상태로 유지된다. 우리의 이성이 그곳으로부터 축출된 진리와 존재의 왕국 ─ 금욕주의적 이상은 바로 이 진리의 가치 그 자체에 대한 신앙이다. 다시 말해 진리를 향한 무조건적인 의지란 금욕주의적 이상 자체에 대한 신앙이며, 형이상학적인 신앙이다. 그리고 이러한 측면에서 아직까지 진리를 믿는 모든 철학과 과학의 배후에는 이 금욕주의적 이상이 있다. 신은 진리이며 진리는 신적인 것이라는 플라톤적인 믿음에서 그들은 불을 얻는다. 그러나 신 자체가 우리의 가장 오래된 거짓으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지금까지 허용되지 않았던 문제, 즉 진리를 문제 삼는 것을 시도해야 한다. 금욕주의적 이상의 신에 대한 신앙이 부정되는 그 순간부터 진리의 가치에 대한 문제가 새롭게 대두된다. 이제 정신은 그 진리를 향한 의지를 제외하고는 다른 이상을 필요로 하지 않게 되었지만, 바로 이 통속적인 무신론이야말로 가장 정신적으로 정식화된 금욕주의의 이상 그 자체이며 모든 겉치레를 제거한 이 이상의 핵심이다. 이제 무신론은 금욕주의적으로 하나의 절대적인 신, 인격적인 신으로서가 아닌 진리로서의 신을 신봉한다. 그러나 이러한 의지, 모든 진리를 향한 의지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진리를 향한 의지가 이와 같이 스스로를 의식하게 될 때 비로소 도덕은 몰락하게 된다. 금욕주의적 이상을 제외할 때 인간에게 남는 것은 무엇인가?


지상에서의 인간의 생존은 아무 목표도 없다. 무엇인가 언제나 결여되어 있었다는 것, 실로 이것이 금욕주의적 이상이 의미하는 바이다. 인간은 다름 아닌 자신의 의미의 문제 때문에 괴로워했다. 그러나 그의 문제는 고통 자체가 아니었고 ‘무엇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가?’하는 질문에 해답이 없다는 것이었다. 인류의 저주는 이 고통의 무의미였고, 금욕주의적 이상은 인류에게 하나의 의미를 주었던 것이다. 이제부터 인간은 무엇인가를 의욕할 수 있었다. 어디를 향해,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인간이 의욕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의지 자체가 구출되었던 것이다. 금욕주의적 이상 속에서 인간적인 것, 관능, 이성 자체에 대한 증오, 미에 대한 공포, 변화와 생성에서 도망치려는 욕망… 이 모든 것은 허무를 향한 의지이며 삶에 대한 적의로 표현된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의 의지이며, 하나의 의지로 남아 있다. 인간은 아무것도 의욕하지 않는 것보다는 오히려 허무를 의욕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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