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와 나는 R을 배웅하고 우리도 하루 관광을 하기 위해 R과 함께 프랑크푸르트로 이동했다. 어스름한 새벽 동역에서 기차를 타 프랑크푸르트에는 아직 점심때가 채 되지 않은 이른 시각에 도착했다. 산들바람이 부는 쾌청한 날씨와 푸르스름한 고층 건물들은 파리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중앙역 보관소에 짐을 맡긴 뒤 간단한 요기를 하기 위해 강가로 나갔다. 여행자들이 별로 없는 상업도시의 한산한 길거리를 활보하는 것은 여유로운 기분이 들게 했다. 베스트하펜 타워 근처의 한 음식점에서 나는 오래전 반디에게서 배웠던 맥주에 대한 몇 가지 상식을 둘에게 알려주었다. 잔 속으로 날아들어와 맥주에 빠져 버둥거리는 벌들을 포크로 여러 번 건져내야 했는데, 바닥에서 벌들은 잠시 엉거주춤한 자세로 날개를 말린 후 금방 다시 날아들었다.
강가를 따라 구시가지 쪽으로 걸어 올라갔다. 프랑크푸르트 성당이 해그림자 속에서 붉게 물들었다가 곧 숯처럼 까맣게 변하기를 반복했다. 우리는 뢰머 광장을 둘러본 뒤 일본식 취향의 카페에서 커피를 마셨다. 역에서 R은 몇 마디 작별 인사를 하고는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사라졌는데, 그것이 여행 1부의 마무리였다. K와 나는 조금 허전한 기분이 되어 미술관으로 향했다. 보고 싶었던 시모네타 베스푸치의 초상은 현재 다른 곳에 대여 중이었다. 우리는 건물 뒤편의 정원에서 잠시 앉아 있다가 저녁을 먹기 위해 다시 강을 건넜다. K의 제안으로 한 중국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생각해보니 작년 겨울 한국에서 송별회를 한 이후로 중국 음식은 처음이었다. K는 미국에서 학교를 졸업한 뒤 한동안 차이나타운에서 살았던 때의 이야기를 했다.
제1논문 요약
‘좋음’이라는 판단은 ‘좋은 인간들’ 자신, 저급하고 천민적인 사람들에 대비해서 자기 자신과 자신의 행위를 제일급으로 느끼고 평가하는 고귀한 사람, 높은 뜻을 지닌 사람들에게 있었다. 이러한 고귀함과 거리의 파토스, 즉 좀 더 높은 지배 종족이 좀 더 하위의 종족에게 가지고 있는 지속적이고 지배적인 근본 감정이야말로 ‘좋음’과 ‘나쁨’의 대립의 기원이다. ‘좋음’의 기원이 비이기적 행위와 결부되어있다는 믿음은 미신이다. 오히려 이러한 이기적-비이기적 대립은 귀족적 가치판단이 몰락할 때 비로소 확립되며 이와 더불어 병자들의 무리 본능이 표현되기 시작한다. 어원학적으로 어느 언어에서나 신분을 나타내는 의미에서의 ‘고귀한’, ‘귀족적인’ 등의 기본 개념에서 ‘정신적으로 고귀한, 특권을 지닌’이라는 의미를 지닌 ‘좋음’이 발전해 나온다. 이와 평행하여 진행되는 또 하나의 발전이 바로 ‘비속한, 천민의’ 등에서 ‘나쁨’이라는 개념으로의 이행이다. 최고의 세습 계급인 성직자의 계급 내부에서도 이에 상응하는, 이를테면 ‘순수’와 ‘불순’ 사이의 대립적인 발달사가 있었다. 성직자적 귀족주의는 이러한 대립된 평가를 위험한 방식으로 내면화시키고 격화시켰는데, 이러한 지배하의 습관 속에는 처음부터 건강하지 못한 것이 있다. 이러한 질병의 치료제로 고안된 것이 바로 금욕주의적 최면술이다.
이러한 상태에서 성직자들과 그들의 병자들의 무리들에게는 오만, 복수, 방종, 사랑, 지배욕, 덕 등이 훨씬 더 위험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성직자의 가치 평가 방식은 필연적으로 기사적, 귀족적 가치 평가 방식에서 분리되어 그 대립으로 발전되어 나가게 되었다. 기사적, 귀족적 가치판단이 전제하는 것은 강한 몸과 생기 넘치고 풍요로운 건강, 그리고 그것을 보전하는 데 필요한 조건들, 즉 전쟁, 모험, 사냥, 춤과 같이 강하고 자유로우며 쾌활한 행동을 함축하고 있는 모든 것이다. 성직자들은 가장 약하고 무력한 자들이라는 측면에서 이러한 가치판단의 가장 사악한 적이다. 그들은 그들의 병을 옮기며 가장 숙명적인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그들은 기사적, 귀족적 인간들을 질투하며 증오하기 때문에 성직자 민족인 유대인은 자신의 적과 압제자인 이들의 가치를 철저하게 전도시키는 방식으로, 즉 귀족적 가치 등식을 역전시킴으로써 가장 정신적인 복수 행위를 성공시켰다. 유대인과 더불어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이 시작된 것이다.
이 반란의 배후에는 2천 년의 역사가 있으며, 유대적인 사랑은 이처럼 증오와 복수에서 태어났다. 예수를 불구대천의 원수처럼 부정하고 십자가에 매닮으로써 이스라엘의 모든 적대자가 주저 없이 바로 이 미끼를 삼키도록 유도한 것, 이것이야말로 진정 위대한 복수 정책이었다. 이스라엘은 자신의 복수와 모든 가치를 전도함으로써 모든 고귀한 이상을 누르고 승리했다. 도덕에서의 노예 반란은 원한 자체가 창조적이 되며 가치를 낳게 될 때 시작한다. 모든 고귀한 도덕이 자기 자신을 의기양양하게 긍정하는 것에서 생겨나는 것이라면, 노예 도덕은 자신이 될 수 없는 것을 부정한다. 이것이 노예 도덕의 창조 행위이다. 고귀한 인간은 ‘좋음’이라는 근본 개념을 먼저 자발적으로, 즉 자기 자신에게서 생각해내고, 거기에서 비로소 ‘나쁨’이라는 관념을 만들어낸다. 고귀한 인간의 원한 자체는 해독을 끼치지 않는다. 자신의 적, 자신의 재난, 심지어 스스로의 비행까지도 오랫동안 진지하게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은 조형하고 형성하며 치유하고 또한 망각할 수 있는 힘을 넘치게 지닌 강하고 충실한 인간을 나타내는 표시이다. (미라보, 나폴레옹) 그들은 힘이 가득 넘쳐나는 필연적으로 능동적인 인간으로, 행복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들에게 활동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행복을 염두에 둔 것이다. 이와 반대로 무력한 자들에게서 행복이란 본질적으로 마취, 마비, 안정, 평화, 안식일, 정서적 긴장 완화 등의 수동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이들 원한을 지닌 인간들은 먼저 그들에게 나쁜 적을, 악한 사람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근본 개념으로 거기에서 그것의 대립물로서의 선한 인간을 생각해낸다. 그것이 자기 자신인 것이다.
고귀한 기원을 지닌 ‘나쁨’과 끝없는 증오의 도가니에서 나온 ‘악함’을 비교해보면 전자는 후에 만들어진 것이며 병렬적으로 나타나는 것이자 일종의 보색인 반면, 후자는 원형이며 시원이자 노예 도덕이라는 구상에서 독기 어린 눈 아래 관찰되는 행위이다. 고귀한 종족은 이방의 것을 접할 때 모든 사회적 구속에서 벗어나 자유를 즐긴다. 그들은 사회의 평화 속에 오랫동안 감금되고 폐쇄되었기 때문에 나타나는 긴장을 황야에서 보상한다. 모든 고귀한 종족의 이러한 근저에서 맹수, 즉 먹잇감과 승리를 갈구하며 방황하는 화려한 금발의 야수를 오해해서는 안 된다. (열렬한 기독교 신자 도스토예프스키에 의해 스비드리가일로프가 ‘악’으로 표현된 것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나폴레옹의 미학을 실험했던 유약한 라스콜리니코프는 정신적으로 승리했지만 끝까지 건강하지 못했다. 이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는 스비드리가일로프는 라스콜리니코프의 악마적 분신으로서 영웅적인 면모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숨겨진 본성은 때때로 발산될 필요가 있다. 짐승은 다시 황야로 돌아가야 한다.
인간이라는 맹수를 온순하고 개화된 동물, 즉 가축으로 길들이는 데 모든 문화의 의미가 있다는 것이 오늘날 진리로 믿어지고 있는데, 이것이 진실이라면 고귀한 종족과 그들의 이상을 모독하고 제압하게 된 유대인들의 원한 본능은 모두 의심할 여지가 없이 본래의 문화의 도구라고 보아야만 할 것이다. 무력한 자들이 고귀한 자들에게 씌우는 이 ‘악함’이라는 굴레는 본질적으로 모든 작용을 작용하는 자, 즉 ‘주체’에 의해 제약된 것으로 오해하는 표현 형식(언어 속에 화석화된 이성의 근본 오류)이다. 말하자면 이들은 맹수에게 맹수라는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노예 도덕은 마치 강자의 배후에는 강한 것을 나타내거나 나타내지 않는 것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일종의 중립적인 기체가 있는 것처럼 강한 것을 강한 것을 표현하는 것과 분리한다. 그러나 그러한 주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활동이 모든 것이다. 자연과학자들이 ‘힘이 움직이게 한다’라고 말할 때 그들은 여전히 언어의 유혹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원자의 개념, 칸트의 물자체)
‘좋음과 나쁨’, ‘선과 악’이라는 이 두 대립되는 가치의 싸움, 즉 로마와 유대인의 싸움에서 로마가 몰락했다는 사실은 대단히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종교개혁과 뒤이은 프랑스 혁명과 더불어 유대가 고대의 이상에 대해 막힘없는 승리를 거두던 도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다. 마치 다른 길을 지시하는 최후의 암시처럼, 인간 나폴레옹이 나타난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서 고귀한 이상 그 자체가 다시 육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