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에로니무스 보스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같은 시대에 활동했지만 르네상스의 밝음이나 이상적인 아름다움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반 에이크적 사실주의가 주는 시각적 쾌감을 추종하지도 않았지만 그의 동화적이고 섬세한 묘사에는 환상을 초월하는 어떤 연금술적인 사실성이 있다. 카프카의 글쓰기에 대해 로브 그리예가 지적했던 점도 바로 이것이다. 섬 같은 이 예술가의 존재는 특이성의 발현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고 느꼈다.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설명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것이 비범한 개성과 천재성의 증표다.
안도가 내부 리노베이션을 한 푼타 델라 도가나는 별 특징 없이 모던했다. 팔라초 그라시의 석재들은 줌터가 팔라디오에 대해 했던 말을 떠올리게 했다. 그 건물에도 일종의 일으키는 힘이 있었다. 건축은 분명 인간을 고상하게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것은 부, 명예, 권력 어느 것과도 관계가 없는 존재론적인 문제이다. 건축의 언어는 사물로부터 바로 그 문제로 나아간다.
올리베티 쇼룸과 팔라초 케리니 스탐팔리아를 구경한 뒤 비엔날레의 나머지 전시를 보기 위해 아스날로 향했다. 거대한 스토아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아스날 건물은 이미 약간 지친 상태가 아니었더라면 훨씬 더 인상적이었을 것이다. 전시 자체보다도 그 공간이 주는 여유로움이 좋았다. 그곳에 수많은 전시물들이 없었다면 공간이 훨씬 더 근사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터덜터덜 걸어갔다.
체력을 완전히 방전시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먼저 숙소로 돌아와 K가 올 때까지 씻고 좀 쉬었다. 잠시 눈을 붙인 뒤 머리가 답답해 옷을 갈아입고 다시 숙소를 나섰는데 멀리서 K가 오는 것이 보였다. 공연은 소프라노의 성숙한 이미지가 감정 이입을 조금 방해했다는 점을 제외하고는 아쉬움이 남지 않았다. 나비 부인이 15세의 동정녀라는 푸치니의 설정은 극 전반의 낭만적이고 장중한 분위기에 비해 지나치게 나이브한 것이 사실이다. 2막에서 아리아가 시작됐을 때는 소름이 돋고 가슴이 울컥했다.
숙소로 돌아와 각자 짐을 정리하는데 K가 선물이라며 책 한 권을 내밀었다. 영국 파빌리온의 전시 기획 도서였는데 제목이 ISLAND여서 특히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