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15 금

by 홍석범

오르간 연주회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갔다. 연주가 시작되기 30분 전쯤 도착해서 교회를 둘러보고 오르간의 맞은편에 자리를 잡았다. 연주가 시작되고 조금 지나자 갓난아기를 안은 여자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왔다. 아기는 울음을 터뜨리지는 않았지만 계속 꼼지락거렸고 그녀는 아기를 품에 안고 좌우로 느리게 흔들어주며 오르간 바로 밑에서 배회했다. 그녀는 계속 소리가 쏟아져 내려오는 그 아래에서 아기의 얼굴을 가슴에 보듬은 채로 작은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주며 간간이 위를 올려다봤다. 그녀의 이런 행동은 성스럽고 감동적이게 느껴졌다. 소리는 그 주위에 둥글고 환한 공간을 만들어 주는 듯했다.






2014. 12. 15



면역력이 약해진 상태에 있다. 답변을 시도해야 한다.



첫째로 진리는 믿음을 필요로 한다. 즉, 진리들은 논리적인 증명이 아니라 자신의 영향을 통해 증명된다. 우리가 진리를 추상으로 분리할 경우, 진리는 어떤 힘이 된다.


둘째로 사물의 본질에 대한 실존철학. 실재를 파악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니체는 이것을 인식의 과잉이라고 지적했다. 실재에 대한 믿음은 종교적인 것이다. 모든 것은 표현된 이후에라야(표현과 동시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나는 가장 중요한 개념을 조응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건축은 다름 아닌 조응하는(시키는) 것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건축함(철학함)을 통해 존재는 존재자로서 드러내어진다. 바로 이 표현─무엇인가가 드러내어지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은 생성으로서의 표현과 치환될 수 있는 자리에 놓여 있다. 그러나 드러내어지는 것은 이를테면 미스가 추구했던 실존적 진리(선행되는 무엇)와는 무관한 것이다. 이 말은 다소 진부하게 들리지만 존재는 이미 만연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존재라는 것의 표현, 다시 말해 모든 표현 그 자체는 언제나 순환적이고 반성적이다. 여기서 모든 크고 작은 속성들은 삶과 관련되어 있다. 자기 내부의 특정한 화학 작용(조응에 대한 은유적 표현)에 의해 어떤 피치 못할 현상이 촉발되게 된다. 그것이 물리적인 변화가 아닌 화학적인 변화인 이유는 모든 존재자들의 속성은 각각 단일하기 때문이다. 고진은 건축을 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 사건은 언제나 유일무이하다.


예전의 메모 중; 우리는 그 장소에서 나는 나임을 깨닫는다. 이 존재의 존재와 연속의 확인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바로 시의 변증법으로서, 이 현상에 대해 릴케는 이미 아주 정확하고 섬세하게 설명한 바 있다; 공간은 우리들 밖에서 사물들로 퍼져나가 그것들을 표현한다: 이 퍼져나가는 공간은 슈마르조가 일찍이 주장했던 ‘나를 가로지르는 이 공간’과 동일한 개념일 것이다. 변증법과 조응은 같은 단어이다. 정말로 놀라운 것은 릴케의 다음 시구이다; 만약 네가 한 나무의 생존을 훌륭히 이루어 내련다면 그것에 내부 공간을 주라, 네 안에 그 존재가 있는 그 공간을. 그것을 속박으로 둘러싸라. 하나 그것은 경계가 없고 네 자신의 포기 한가운데서 질서를 찾을 때에야 정녕 한 나무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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