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오랜만에 니키타를 만나 점심을 먹고 공원에서 오후 내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그는 친구와 4주간 캠핑 여행을 한 뒤 스칸디나비아에서 돌아온 지 사흘밖에 되지 않았다. 친구가 운전을 하는 대신 육류는 물론이고 생선도 먹지 않는 니키타가 요리를 맡는 바람에 그 불쌍한 친구 역시 강제로 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들은 심지어 노르웨이에서조차 연어를 먹지 않았다.
설계와 연구에 대한 짧은 논쟁. 내가 말한다. “디자인과 연구는 다른 분과의 일이다. 디자인에 도움을 주는 연구가 있다고는 믿을 수 없다.” 니키타가 말한다. “유형학을 예로 들 수 있다. 그것은 우리의 시야를 넓혀준다.” 내가 말한다. “주제별로 유형을 분류하는 것은 오히려 디자인을 한정한다. 어떤 디자인을 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유형이 있는지를 전혀 알 필요가 없다.” 니키타가 말한다. “그러나 분명 유형들은 존재한다. 다양한 유형들이 왜 그렇게 형성되었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그 유형을 의식적으로 적용하든 새로운 변형을 시도하든 두 경우 모두에 도움이 된다.” 내가 말한다. “그 두 경우 모두 유형학의 연장으로서의 디자인일 뿐이다. 그때 디자인은 항상 유형에 관계된 것으로서만 의미를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당연히 유형은 있다. 그리고 새롭게 만들어진 디자인 역시 언젠가는 다시 특정 유형에 속하게 될지 모른다. 그러나 디자이너에게 그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창조적으로 사고하는 디자인은 언제나 유형으로부터 사고하는 디자인을 초월할 것이다.” 니키타가 말한다. “유형학은 일종의 집단지성이며, 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그 안에 어떤 진리가 있음을 증명하고 있다. 그것은 역사가 가지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우리는 그것으로부터 배울 만한 것이 있다.” 내가 말한다. “우리는 디자이너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어쩌면 건축사학자나 비평가들에게는 의미가 있을 수도 있다. 보르헤스는 사실 수많은 은유들은 오랫동안 전해 내려온 몇 안 되는 유형들로 소급될지 모른다고 말했지만, 예를 들어 달은 거울이라는 흔한 은유가 시대에 걸쳐 여러 번 반복될 때, 실제로 중요한 점은 그런 유형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그 수많은 동일한 은유들이 시대에 따라 혹은 환경에 따라 혹은 화자에 따라 혹은 방식에 따라 항상 다르게 말해진다는 사실이다. 한 시인이 3000년 전 이름 모를 그리스 시인이 썼던 은유를 똑같이 쓴다고 하더라도 지금 그 표현이 가지는 의미와 효과는 전혀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물론 그는 3000년 전 이미 누군가가 달은 거울이라고 썼다는 사실을 전혀 알 필요가 없다. 유형학은 그가 그 유형의 역사에 무지한 채 스스로 달은 거울이라고 쓴 그 결과물을 더 좋은 것으로도 더 나쁜 것으로도 만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