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6 토

by 홍석범

2015. 10. 6



어제는 오후 내내 생기론을 읽고 저녁에 평면을 조금 고민했다. 분명 이 평면 속에는 작년에 그렸던 그림들이 들어 있다. 그리고 최소한 그러한 구석들에서만큼은 이 집이 행복할 것임을 확신한다.


아침에 깔린 안개가 거의 세 시간 넘게 걷히지 않았다. 처음으로 입김이 보였다. 낮과 밤의 일교차가 심하다.


철학 못지않게 예술 역시 사유한다. 그것은 정서와 지각에 의해 사유한다. 우리는 개념들을 통해, 혹은 기능들을 통해, 혹은 감각들을 통해 사유한다. 예술은 감각을 개념으로 대체시키는 대신 그것을 확장시킨다. 카오스와 끊임없이 투쟁한다는 측면에서 예술이 사유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장용순은 현대의 정신을 양태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구조주의는 이 양태를 도식화한 것이다.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인식 가능하게 표현할 것인가? 이러한 세계를 우리는 어떻게 운용할 것인가? 이것이 내가 이해하게 된 구조의 가장 본질적인 역할이다. 아마도 이러한 측면에서 양태에 대한 다양한 시도들은 복잡계 과학과 공명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이제 원자구름을 파악하고 ‘미분적인 관계’들을 측정한다. 우리가 속하는 세계는 이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시적인 하나의 양태인 동시에 미소한 무한의 양태이기도 하다. 라이프니츠의 녹색 이론. 현대의 지성은 비로소 인지 가능하게 된 이 데이터들에 의해 압도되었다. 조합 가능성의 수를 계산해내는 것으로 현대적 사고는 그친다. 들뢰즈가 주장하는 구조로서의 잠재적 평면은 아빠의 말을 빌리자면 ±사랑과 증오의 항을 전부 가지고 있는 하나의 절대적인 도식에 불과하다. 실제로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묘사 가능하지만 아무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현대의 사고방식은 왜라고 묻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을 묻지 않고 어떻게 카오스와 투쟁하는지 나는 알 수 없다. 환경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니힐리즘의 일종이다.


표류의 본질은 방랑객 앞에 장소들이 나열된다는 데 있지 않다. 모든 건축들은 실험들이며 … 특정한 연산의 결과로서 … 위상학적으로 새로운 유형을 제시하는 … 근본적으로는 전부 동일한(그럼으로써 현대성을 취득하는) 도식들이다. 평면은 다이어그램으로 환원 가능하며 그 다이어그램은 현대 도시의 요구에 부합하는 모든 ±사랑과 증오의 항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역설적으로 건축에게서 그것의 고유한 역할과 책임을 갈취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고삐 풀린 건축은 더 이상 그 어떤 말도 할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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