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0 수

by 홍석범

2014. 12. 20



표현에 대한 갈망은 누구에게나 존재한다. 표현만이 우리들이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수단이다.



지금부터 내 머릿속에 실타래처럼 엉켜 있는 것들을 차례로 푸는 시도를 해야 한다. 하이데거는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고 불렀다. 언어는 존재가 인간과 관계 맺는 방식 중에서 가장 고유한 관계 방식이며 본질적으로 존재가 인간에게 현성하는 가장 소박하고 가까운 방식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어는 인간적 차원의 것이라기보다는 철저히 존재에 의해 짜 맞춰진 것이다. 말하자면 언어는 모든 표현의 시작이며 궁극적인 형식이자 질료이다(그러나 이것은 전부 동어반복이다). 이때의 언어는 일종의 고유명사이다. 우리는 다소 형이상학적으로 존재가 바로 이 언어라는 고유명사 속에 잠들어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집─겨울잠을 위한 동굴로서의 언어는 우리에게 파악될 수 없는 언어이다. 인간은 절대로 언어를 전체적으로, 회화적으로 파악할 수 없기 때문에 집으로서의 언어는 하나의 개념에 그치는 것이다. 우리는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거의 확신하며 얘기할 수 있겠지만 그것은 우리가 마치 씨앗 안에 꽃이 들어있다는 것을 안다고 말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언어라는 표현은 비로소 말해지면서 시작된다. 그러나 말해지는 언어는 동시에 필연적인 한계를 지니고 있다. 레싱이 분석했던 시인의 예술이 바로 그것이다. 언어는 곧 시간이기 때문에 존재는 언어(말해지고 있는)를 통해 비로소 잠에서 깨지만 그것은 말해지기가 멈추는 그 순간부터 다시 잠들게 된다. 말해지는 언어 속에서 비로소 드러내어지는 존재는 언제나 순간적이고 수면 위의 파동처럼 점차 약해질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사유(시간)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존재의 현성을 생각해볼 수 있는데, 이것은 사유의 구축(언어)이 구축의 사유(건축)로 전환되는 것을 의미한다. 건축은 바로 이러한 존재 현성의 방식이다.


김영철 교수님의 팔리노디아; 건축은 “존재자가 존재하는 한에서 그 존재자란 무엇인가?”를 탐구한 사유를 구체화한다. 건축은 존재자의 존재에 다가가는 도상에서 그 사유의 흔적들을 체계의 자취로 남긴다. 즉, 존재의 관점에서 존재자를 탐구해낸 성과의 기록이며 지향점이기도 하다. … 우리는 건축이 어떻게 또 어떠한 방식으로 존재하는지를 경험할 때에만 ‘건축이라는 바로 그것이 무엇인지’를 이해할 수 있고 또 실천할 수 있다. 건축은 존재자의 존재의 소리에 스스로 맞추는 그런 응답함의 형식 속에 있는 것이다.


존재의 소리에 스스로 맞추게 되는 응답함의 형식으로서의 건축이 바로 조응이다.

매거진의 이전글2017. 12. 19 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