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 쓰기에 소홀하면서 침전물이 쌓이기 시작한 기분이 든다. 뮌헨에서는 기록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매일 많은 것을 보고 느꼈고 이 일기장은 내 가방 안에 있었지만 한 번도 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기억에 우선순위가 생기기 시작했기 때문에 경험이 묵히도록 놔둔 것은 잘 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상과 감정의 돌멩이들은 이리저리 부딪히며 더 만질만질하고 순수한 것으로 연마되었을 것이다.
두 번째로 오르간 연주회를 듣기 위해 교회에 갔다. 이번에는 연주자가 보이는 2층 발코니에 앉았다. 연주가 시작되고 그녀는 양손과 양발을 모두 사용해 거대한 건물 같은 악기를 조종하기 시작했다. 곧 오보에 연주자가 등장했는데 얇고 긴 목관악기의 소리가 너무 깨끗해서 순간 웃음이 나왔다. 1악장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배 안쪽에서부터 웃음이 거품처럼 밀고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맑고 동글동글한 음들은 가벼운 날갯짓으로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갔다.
비가 내리기 시작했지만 바르토와 나는 카페 앞에 앉아 거의 3시간가량 잡담을 나누었다. 많은 사람들이 우산을 쓰지 않고 지나갔다.
점심을 먹고 우연히 텔레비전으로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을 듣게 되었는데 그것은 연주라기보다는 공연처럼 느껴졌다. 그 러시아인은 오페라 무대에나 어울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니체는 하나의 쟁점을 간파하기 위해 무차별적으로 쓴다. 그것은 자기와의 대화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은 그 도상에서 분명 길을 잃게 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러한 의식에 기초하는 자유로운 글쓰기는 자유로운 읽기를 가능하게 한다. 나는 그것을 카프카를 통해 처음 깨달았다. 그 결과 내용은 사라지고 섬세한 모서리들만이 추상화처럼 남게 되었는데 그것을 누군가는 꿈의 풍경이라고 불렀던 것 같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장소의 어원적 의미는 창끝이다. 창끝은 창의 모든 것이 합류하는 지점인 동시에 그 모든 것이 거기로부터 흘러나와 비로소 그 무엇으로 존재하게 되는 원천이다. 그는 이 원천을 장소라고 불렀다. 우리는 어떤 시를 가능하게 하면서도 감추어져 있는 이 원천으로서의 장소로 귀환할 수 있는 새로운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시는 언어로 표현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우선 개별적 시적 작품 안에서 언어로 표현된 것에 입각해 시의 장소를 지적해야 한다. 이 일차적 규명이 전제되어야 그런 의미를 가능하게 하지만 언어로는 표현될 수 없는 그 장소로 귀환하는 작업인 논구─시와 사유의 대화─가 가능하게 된다. 이것은 하나의 건물이 지어지는 과정과 동일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재료로 하나의 체계를 구축하지만 그 결과물은 궁극적으로 그 물리적인 체계를 초월하는 하나의 장소가 된다. 논구와 규명은 해석학적 상관관계에 있다. 존재론적으로는 논구가 전제되어야 규명이 가능하지만, 인식론적으로는 역으로 일차적 규명이 전제되어야 논구가 가능하다. 결국 반성적 사유에 이르게 되는 이 순환은 우리가 구축으로서의 사유(건축)를 통해 원천적인 장소의 이미지를 얻게 되기까지의 도상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장소는 설계 이전에 이미 존재하며, 건축은 그것을 드러내게 되는 하나의 사건이다. 우리는 그 건물을 통해 반대로 장소를 인식하게 되지만, 존재론적으로 장소가 이미 그곳에(모든 곳에) 있었기 때문에 그 위에 비로소 건물이 지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규명과 논구의 상호작용은 바슐라르의 ‘과거의 기억을 뒤덮는 몽상’과 근본적으로 같은 개념으로 보인다.
윌리엄 고이언; 시초에는 이름을 알아서 부를 수도 없었던, 처음으로 보는 장소에서 이 세계에 태어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이름 없고 모르던 장소에서, 그 이름을 알게 되기까지 자라나고 돌아다녀 그 이름을 사랑으로써 부를 수 있으며 ─ 그 이름을 가정이라고 하고 거기에 우리들은 뿌리를 박는데, ─ 그곳을 스스로의 사랑의 보금자리로 할 수 있다는 것, 그리하여 우리들이 그곳에 대해 말할 때마다, 연인들이 그리하듯 향수에 찬 노래로, 바람에 넘치는 시로 말하게 된다는 것!
이 몽상가의 형이상학은 우리를 마치 존재의 연옥에 머무르도록 하는 것 같다. 건축에의 의지는 이 장소로 향해 있다. 이렇게 아르케적 문법구조는 상대적이고도 몽상적인 시적 은유로 대체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무엇보다 그것은 과거의 기억을 뒤덮는 방식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장소의 역사에 하나의 개인적인 가능성을 제시함을 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