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 12. 23 토

by 홍석범

책이 나에게 위안과 행복을 주는 이유는 내가 그것을 다시 펴고 읽을 때마다 그것이 거기에 계속 있음을 나에게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새로워지는 것이다. 그것은 생명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내부로부터 전개되는 세계를 가지고 있다. 나는 결코 그 안으로 뚫고 들어갈 수는 없지만 코를 바짝 붙이고 그 안을 들여다본다. 어느 순간 아주 미세한 진동에 의해 경계가 사라지면 나는 앞으로 걸어나갈 수는 없지만 뒷걸음치지도 않는 상태로 계속 머무를 수 있게 된다. 이것이 최고도의 문학적 순간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어쩌면 나 자신은 책의 내부적인 존재에 주어지는 외부적인 운명이다.


뮌헨에서 마지막 날 예술가들의 책에 대한 전시를 관람하기 위해 바이에른 주립 도서관을 다시 찾았다. 이곳은 믿을 수 없게도 1663년 이후 바바리아 지역에서 출판된 모든 책을 두 권 이상씩 사들였다. 지식의 전달이 유일한 종교인 공간에서는 과거도 현재도 아닌 시간의 힘을 느낄 수 있다. 벽 한쪽에 칸트의 말이 걸려 있는 것이 약간 기이하게 느껴졌다. 그의 목소리의 일부가 계속 그 자리에 남아 있는 것일까? 그것은 먼지 쌓인 수많은 책장들 사이에 과거 혹은 미래의 누군가가 끼워놓은 운초처럼 흘러들어온 것일까? 예술가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책을 탁월한 표현의 도구로 사용해왔다. 그들은 책을 하나의 사물로 다뤘고 아주 특별한 종류의 예술이 탄생했다. 루이 부르주아의 거대하고 흰 폴리오는 고대 서사시인들의 웅변과는 다른 종류의 웅변이며 그 속의 말들은 다른 종류의 시다. 책을 만든다면 그런 책을 만들어야만 한다고 느꼈다.






2014. 12. 23*



하이데거는 철학의 기원을 사유하면서 존재한다는 사실이 그리스인들에게는 가장 큰 경이로움이었다고 썼다. 존재자는 존재한다는 사실에 우리는 그다지 마음을 쓰지 않는다. 그 말은 우리에게 진부하게 들리며 그 사실은 누구나 다 알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이 사실이 그리스인들에게는 가장 놀랍고 경이로운 것이었다. 그들은 이 놀라움이 아무나 이해할 수 있는 설명 속에서 사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들은 지성을 시장에 내놓은 소피스트들에 대항해 이 아르케(존재자의 존재를 결정짓는 제1근거)를 목적으로 하는 사유를 세우고자 했는데, 이것이 바로 소폰이다. 그들은 소폰을 사랑하는philein to sophon 자들로서 다른 사람들에게 소폰을 일깨워준다. 플라톤은 사형당하기 직전의 소크라테스로 하여금 10대 소년인 테아이테토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한다. “그렇게 놀라는 감정, 즉 파토스야말로 실로 사유를 사랑하는 자의 것이네. 이것 말고 철학의 다른 출발점은 없네.” 소폰을 세우고 추구함으로써 그리스인들은 존재의 경이로움으로 나아가고 그것을 지켜낼 수 있었다. 이 사실은 니체가 그토록 염원했던 그리스의 정신과 그대로 이어지는 것이다. ‘하나의 철학이 문화가 싹트는 발단이 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적들로부터 현존하는 문화를 수호하는 것. … 저들 그리스의 철인들은 그리스적인 것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기 위해 시대정신을 극복했다. 그리스인들이 철학을 했다는 사실은 철학을 정당화한다.’ 나는 이 말을 다음과 같이 받아들인다. ‘하나의 건축이 문화가 싹트는 발단이 될 수 있는가? 아니다. 그러나 위험한 적들로부터 현존하는 문화를 수호하는 것. … 저들 그리스의 건축인들은 그리스적인 것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기 위해 시대정신을 극복했다. 그리스인들이 건축을 했다는 사실은 건축을 정당화한다.’ 코르뷔지에는 파르테논을 위대한 정신이라고 불렀다. 하이데거의 물음에 대한 김영철 교수님의 팔리노디아는 건축의 근거를 구축의 사유에서 찾기 위한 시도였다. 여기서 건축은 존재자를 시야에 받아들일 수 있는 탁월한 권역, 다시 말해 그것이 존재자인 한에 있어서 그것이 무엇인지was es ist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을 받아들여 잘 다스릴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 된다. 그것은 원천으로서의 장소를 드러냄으로써 존재에 파토스를 되돌려준다.


그리스적인(원천적인) 것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기 위해 시대정신을 극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장소의 역사에 하나의 개인적인 가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건축에서의 역사성(이 단어는 지나치게 자주 장소성과 혼돈된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장소로의 인식론적 접근에 있어 가장 중요한 동사─발굴─의 본질적인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발굴은 건축에서의 논구이자 시적 몽상이며 과거의 기억을 뒤덮는 변증법이기 때문이다. 니체가 실존의 문제를 가지고 고대 그리스로 돌아간 것은 현재에 대한 관심 때문이다. 그는 결코 과거를 재인식하기 위하여 고대로 돌아간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의 목적은 과거로부터 미래를 인식하는 바로 그 정신을 배우는 것이었다. 그는 고전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고전학자에게 고대를 통해 자신의 시대를 좀 더 잘 이해하라는 과제를 부과한다면 그것은 끝없는 과제이다 ─ 이것이 고전학의 이율배반이다 : 사람들은 사실상 고대를 항상 오직 지금에서 이해했다 ─ 그런데 이제 지금을 고대에서 이해한다?’ 구축의 사유로서의 건축은 이 고전학에서 시작한다. 이것은 시대정신을 극복하는 것이다. 니체는 고대의 인식을 통해 지금을 보다 깊게 사유함으로써 오로지 현재인 삶의 충일에 기여하고자 했다. 바로 이 고대의 유일하게 생산적이던 시기에 헤라이클레이토스에 의해 존재의 경이로움을 수호하는 구축으로서의 사유가 세워졌다. 하이데거는 사유가 감각적 자료를 종합하여 우리 앞에 객관으로 설정해 놓음으로써 정립으로서의 존재(우리는 대상을 볼 때 그것이 무언가로서 존재하고 있다고 믿기 때문에)가 확보된다면, 사유는 이 정립으로서의 존재가 발원하는 원천으로서의 장소가 된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의 정신은 건축이 집결함과 동시에 해방되는 장소가 된다. 이 사유-장소는 인간이 집을 짓기 시작한 최초의 터다. 그러나 이 장소로 우리는 어떻게 귀환할 수 있는가? 건축가에게는 고대와 현대 사이의 과거를 초월하는 변증법이 필요하다. 그는 현시대의 상황을 파악하여(규명), 그 자료를 종합해 건물을 짓는다. 이것은 그 현재의 장소에서 우리로 하여금 시작하도록 하는 하나의 임의적 역사를 상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하나의 사유로서/써 그 건물과 대화를 시작함으로써(논구) 진정한 장소(사유-장소)의 발굴을 비로소 시도하게 된다.


그리스인들이 향유했던 이 장소는 객관적 인식으로 찾아지는 것이 아니다.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는 삶이란 어떤 것인가? 니체는 모범적 고대는 오로지 모범적 인간을 연구하듯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건축가는 그리스의 정신으로 사유할 수 있어야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과거를 초월하여 고대와 현대를 맞닿게 하는 것이 바로 시다. 하이데거는 시인이 시를 쓰는 것은 시 짓는 말함이라고 했다. 시 지음이란 뒤따라-말함, 즉 아름다운 소리를 건네받아 뒤따라 말하는 행위로서 시 지음은 아주 오랫동안 귀 기울여 어떤 하나의 들음으로 가져오며 ─ 다시 아름다운 소리를 말함으로 울려 퍼지게 하는데 ─ 이것이 말해지는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 건축가에게 그리스의 정신은 그가 귀 기울여 들어야 하는 대상을 찾아준다. 그는 그리스인들에게서 그가 스스로 경험하는 것을 배울 수 있다. 원천으로서의 장소를 발굴하는 데 결정적인 이 시인의 정신을 코르뷔지에 역시 이해하고 있었다. ‘살기 위한 기계에 대해서도 최후의 진술은 시, 곧 예술이 한다.’ 그는 펜텔리콘의 채석장 위에서 흐트러진 채로 미동도 없던 돌들을 조화롭게 만든 것은 엔지니어가 아닌 위대한 조각가였다고 천명했다. 이것은 니체가 꿈꿨던 일─바로 예술에게 권리가 되돌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는 삶이며 그것은 건축의 의미, 즉 조응으로서의 의미를 반증해준다.


시와의 대화를 통해 건축가는 기억의 피안에서 한 개인의 터를 비로소 알아보게 된다. 그곳은 그곳으로부터 그의 모든 안락과 존재적 정착이 비롯하는 장소이다. 다른 모든 장소에 대한 그의 지식은 바로 그 장소로부터 발원한 것이다. 그곳은 장소에 대한 그의 사랑(토포필리아)으로서의 원천적인 장소이며 그리스인들이 최초로 발견했던 사유-장소가 그의 내부에서 발굴된 것이다. 그 장소로부터 다시 (그의) 건축은 시작한다. 건축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집에 대한 것이기 때문에 그 사유는 개인의 역사를 고전적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것은 고고학이 아닌 고전학이다. 사유-장소의 발굴은 한 개인으로서의 인간의 인식을 발굴하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이 시도는 건축의 필요조건을 해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나는 결론에서 시작해 역행하여 나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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